【에이블뉴스 장윤경 칼럼니스트】아니, 다들 이 시간에 어쩐 일들이야.”

성탄절을 앞둔 무렵,

아들 등교 후, 학교 앞 카페 창 너머로 도움 반 엄마들이 브런치를 즐기는 모습에, 반갑게 인사를 건네며 지나갔다. 그 후로도 자주 그들만의 모임이 유독 내 눈에만 들어오자, 비로소 그때 알았다.

나는 왕따 맘이었다.

나 이외에 또 다른 통합 반 장애 엄마도 그 모임에 속하지 못하고 있다는 건, 시간이 알려주었다. 아이러니하게도 특수교육 대상자 부모들 세계에도 자녀의 장애 정도와 도움 반 이용 여부에 따라 보이지 않는 벽은 분명 존재하고 있었다.

그 순간, 씁쓸함이 밀려왔지만 그렇다고 그 모임에 꼭 어울리고 싶은 간절함도 없었다. 오히려 교문 앞, 혹은 치료실에서 그들과 마주칠 때면 평소처럼 인사를 나누고 행동과 표정에 중립을 지켰다.

봄 방학을 하루 앞두고, 도움 반 엄마들은 한 명도 빠짐없이 모여달라는 단체 문자 공지에 모임 장소로 향했다.

“어차피 예준이 정도면 지금도 도움 반 방과 후 수업도 안 하니까, 내년 보조 인력 지원은 더 받기 힘들 텐데 예준 언닌 괜찮아요? 내년에 우리 애는 실무사, 공익요원 배정시간 줄어서 아주 속상해 죽겠어요, 아니, 우리 학교 도움 반, 그 엄마 말이에요. 자기애 중증장애인 게 무슨 벼슬이냐고요, 무조건 보조 인력은 당신 아들 우선 배치에, 시간 배정도 더 받은 걸 당연시 하더라고요. 아주, 기가 막혀서 말이 안 나와요. 저한테 뻔뻔하게 미안해하지도 않는 거 있죠!”

옛말에 여자 셋이 모이면 접시가 깨진다는 말이 이럴 때를 두고 하는 말인가? 싶었다.

아니, 그녀들은 나를 왕따 시키며 아침마다 브런치를 즐기고 서로 의자매 것처럼 죽고 못 살던 삼총사 엄마들 아니었던가? 시간이 지나자 그들 간에도 서로 의견 충돌이 있었는지 내가 자리에 앉기도 전에 삼총사 중 한 엄마가 함께 다니던 중증 장애 엄마 험담으로 모임의 시작을 알렸다.

“여러분, 혹시 제가 예전에 활동보조인 학교 출입에 대해, 학교장 승인받자고 제안했던 거 다들 기억하세요? 지금처럼 내년 도움 반 신입생이 오면 서로 보조 인력 시간 배정에 불만이 생길 걸 예상했던 거예요. 지금 우리가 이 자리에 없는 사람 뒷말할 때가 아니라, 각자 특수 교사와 소통해도 학교 여건상 장애가 심한 학생이 우선이라면 어쩔 수 없이 내년 학교방침을 따라야겠죠. 하지만 교장 선생님께서 외부인력 출입만 허락을 해주신다면 이 문제 바로 해결되리라 보는데 여러분 의견은 어떠신지, 오늘 이렇게 모인 김에 결론을 내면 어떨까요?” 내가 입을 열었다.

그러자 마침 보조 인력 시간 배정에 불만이 가득했던 엄마까지 합류해, 모두 만장일치로 보조 인력 출입, 학교장 승인 건에 동의했다. 그러나 그 누구도 선뜻 교장실이라는 호랑이굴에 제 발로 찾아가 이 내용을 전하겠단 사람도 없었다.

“네, 괜찮습니다. 저 혼자 갈게요.”

잔 다르크도 아닌 나는 그 순간, 어디서 그런 용기가 난 걸까?

다음날 내가 정신 차리고 눈을 떴을 때 이미 교장실 문 앞에 홀로 서 있었다. 아니나 다를까 학교 측에서는 사전연락 없이 방문했다며 나를 제지했지만, 나는 교장 선생님이 나오실 때까지 눈치도 없이 졸업식과 방학식 행사가 다 끝나도록 교장실 문 앞을 떠나지 않았다. 그렇게 긴 기다림 끝에 만난 교장과의 단독면담은 30분 만에 드디어 보조 인력 출입을 허락받았고, 당당히 교장실을 나설 땐 마치 내가 개선장군이라도 된 것 같은 기분으로 봄 방학을 맞이했다.

그러나 새해맞이 기대도 잠시, 상상도 못 한 손님, 코로나 19가 찾아왔다.

결국, 외부 보조 인력 교내 출입계획은 다시 한번 수포로 돌아갔고, 코로나 19로 집에서 동굴 생활과 동시에 초등 3학년을 맞이했다.

마스크를 쓴 채 대면한 3학년 첫 개별화 회의 날.

새 담임 선생님은 아쉽게도 발달 장애아이는 전혀 지도 경험이 없으신 젊은 남자분이셨다.

“어머님, 이제 초3 교과 과정이면 국어, 수학도 조금씩 어려워지고 코로나로 주 2회 등교하니 등교 날 국어, 수학 시간은 도움 교실에 내려가서 수업을 받게 하는 건 어떨까요.”

나는 망설이지 않았다.

“아직 초등 3학년이면 저학년이고 선생님 말씀대로 코로나로 등교 횟수가 많지 않은데 예준이도 오롯이 3학년 4반 소속감을 느낄, 기회를 주실 수는 없을까요? 물론 선생님께서 장애 학생 지도하실 때 많이 힘드실 줄 압니다. 하지만 우선 통합수업으로 지도해보시다가 너무 큰 어려움이 있으시면 저와 다시 의논해주시고 그때 도움 반 이용 여부를 결정하고 싶습니다.”

개별화 회의 경험도 3회차가 되어가니 담력도 경력처럼 쌓인 덕분인지 내 목소리도 그 어느 때보다 당당했다.

내 말이 끝나자, 남자 담임 선생님은 마스크 너머로 걱정된 표정을 감추지 못했고, 특수 교사의 중재 끝에 통합수업 유지안에 서명하자 회의가 끝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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담임 선생님께서도 방학기간 하루도 빠짐없이 써온 30장의 일기와 글씨체에 놀나는 눈치셨다. ©장윤경

매일 아침, ‘위기는 곧 기회’라는 말을 마음에 새기며 기도로 아침을 열었다.

평소 학교에 예준이를 보내놓고 늘 마음 졸이며 헬리콥터 맘이던 나는, 오히려 화상 수업이 컴퓨터를 통해 반 친구들의 수업도 관찰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어 좋았다. 늘 남보다 10분 일찍 컴퓨터에 접속해 수업을 준비하고 과제물도 더 꼼꼼히 제출하며 아들의 성실함을 강조했다. 심지어 방학 과제로 쓴 일기와 독서기록장은 하루도 빠짐없이 30장을 만들어 제출하자 담임 선생님께서도 아들의 반듯한 글씨체와 그 정성에 또 한 번 놀라는 눈치셨다. 비록 내 몸은 좀 힘들었지만, 마음은 그 어느 때보다 편했다.

세상의 그 어떤 것도 노력과 성실함을 이길 것은 없었다.

아들과 나의 성실함은 담임 선생님의 장애에 대한 선입견을 바꿨으며, 발달 장애아이도 충분히 완전통합 교육이 가능함을 말이 아닌 태도로 증명했다. 그 시간이 시나브로 쌓이자 예준이는 1년간 또 한 번 완전통합 수업을 자연스레 할 수 있었다.

나는 코로나로 외출하지 못하는 시간을 그 어떤 때보다 의미 있게 쓰고 싶었다.

하루 평균 3시간을 테이블에 앉아 그림을 색칠하고 있는 아들의 모습을 보며, 본격적으로 전국 미술 공모전 응모를 계획했고 한 달 평균 3곳에 도전했다. 대학부설 장애 미술교육과 복지재단 미술수업도 인터넷 화상 수업으로 유지하며 코로나를 핑계로 멈추지 않았다. 화상교육 3시간이라는 다소 생소한 방식에도 지루함 없이 미술을 즐기는 아들의 표정만으로도 예준이는 얼마나 미술을 사랑하고 즐기는 아이인지 관찰할 절호의 기회였다.

생각을 바꾸니 코로나로 인한 화상 미술수업은 나도 함께 예술로 초대되어 배우는 시간이었다.

지금에 와서 코로나 시기를 떠올려보면, 예준이가 미술을 가장 행복하게 즐기고 온전히 나와 함께했던 때로 기억되고 있다.

나는 생각했다.

‘아들에게 미술수업은 학교, 학원과 같이 전문 강사가 있는 공간, 혹은 개인 작업실이라는 특정 공간이 있어야만 가능하다 보는 건 선입견 아닐까?’ 이왕이면 가족이 함께 있는 공동체 공간 바로 ‘거실’을 떠올렸다. ‘거실이 미술 작업실이라면, 가족 모두가 아들의 작업실에 늘 초대되는 셈이니 미술은 우리 가족의 삶이자 생활이 되지 않을까?’

나는 거실에 혼수로 마련해온 교자상 두 개를 펼쳐 조금은 다른 집 거실 풍경을 꾸미자 남편도 당황하는 눈치였다. 거실이 좀 지저분해지면 어떤가? 이제는 교자상이 손님 접대용이 아닌 미술을 즐기는 아들용으로 변신하자, 언제든 미술을 주제로 함께 아이 눈높이에서 소통할 수 있는 거실 아틀리에는 더없이 완벽했다.

여름방학 어느 날,

“여보세요, 양 예준 학생 어머님이실까요? 공모전에 예준 학생 작품이 ‘동상’을 수상 했습니다. 이번 공모전은 서울 시내버스 내 영상광고와 버스 외벽 전체에 그림이 부착되어 서울 시내버스 내 광고영상으로 계속 송출될 예정입니다. 그래서 다음 주에 자택 작업실로 방문해 직접 작업과정을 촬영하고 학생 인터뷰를 할 예정인데요. 괜찮으실까요?”

서울 시내버스 코로나 광고 캠페인 그림 공모전 담당자로부터 연락이 왔다.

수상 소식에 기쁘고 감사한 마음도 잠시, 아들의 인터뷰 내용을 광고방송자료로 쓴다는 말에 순간 당황과 걱정이 내 입을 열게 했다.

“선생님, 저희 아들은 발달 장애가 있습니다. 그렇다 보니 인터뷰가 조금은 힘들 수 있는데 영상촬영 참여 가능할까요? 기회를 주신다면 꼭 해보고 싶습니다.”

다행히 촬영감독은 자택에서 우선 촬영은 시도해보고 자료 사용 여부는 회의 후 판단하겠다며 예준이에게도 기회를 열어주었다.

그날 밤, 나는 아들의 인터뷰를 생각하니 잠이 오질 않았고, 결국 예상 대본을 미리 준비했다.

촬영당일 , 아들이 언어장애가 있더라도 스스로 표현할 기회를 줘야 함을 깊이 반성했다. ©장윤경
촬영당일 , 아들이 언어장애가 있더라도 스스로 표현할 기회를 줘야 함을 깊이 반성했다. ©장윤경

촬영 당일, 촬영이 한 시간 정도 흘렀지만, 책을 읽듯 준비한 대본을 읽어내는 부자연스러운 말투 때문인지 촬영감독은 당황해했고, 결국 예준이의 대본을 치우며 감독이 말했다.

“예준아, 아저씨가 궁금한 게 있어! 지금 여름방학하고 혹시 제일 보고 싶은 학교 친구 있으면 카메라 보면서 천천히 친구 이름 말해볼 수 있을까?”

그 순간 “내 짝! 권 노은, 많이 보고 싶다.”라고 제법 자연스레 답하는 게 아닌가!

그 한마디를 놓치지 않은 촬영감독은 아들의 모습을 자연스레 카메라에 담자 만족한 듯 촬영을 드디어 끝냈다. ‘아! 나부터 예준이가 언어장애로 인터뷰가 어려울 것이란 선입견을 버리고, 짧고 간결하게라도, 스스로 표현할 기회를 줬어야 했구나!’라고 깊이 반성하고 배우는 순간이었다.

일주일 뒤,

촬영 완성본이 나왔다면서 촬영팀 담당자로부터 자료를 받았다. 영상 시작 첫 화면에 아들 또래 비장애 아이들이 코로나 19에 대한 자기 생각을 자연스레 말하는 모습이 보였다. 캠페인 영상자료가 대략 끝나갈 무렵까지, 그 어디에도 아들은 보이지 않았다.

‘아, 결국 통편집됐구나.’라고 포기하던 바로 그때!

놀랍게도 캠페인 광고가 끝날 마지막 무렵, 아들의 모습만 전체 클로즈업되면서 예준이의 그림이 버스 외벽에 장식되어 시내버스가 서울 도심을 달리는 영상으로 마무리되는 게 아닌가?

아들의 캠페인 촬영 영상이 통편집 된 줄만 알았는데 놀랍게도 마지막 앤딩 클로즈 업 되는 순간.  ©장윤경
아들의 캠페인 촬영 영상이 통편집 된 줄만 알았는데 놀랍게도 마지막 앤딩 클로즈 업 되는 순간.  ©장윤경

마치, 내 아들이 대상 주인공처럼 마지막을 장식하다니 더 없이 감사가 흘러넘쳐 보고 있는데도 믿어지지 않았다.

“어머니, 예준이의 순수한 표정이 너무 좋았기에 회의 끝에 만장일치로 앤딩 장면을 장식하게 되었습니다. 축하드립니다.”

나도 모르게 영상 감독에게 감사의 전화를 드리고 있을 때 감독의 목소리에 눈물이 흘렀다.

 코로나 19 캠페인 광고모델이 된 후 버스에 탑승해 기념사진을 찍던 순간. ©장윤경
코로나 19 캠페인 광고모델이 된 후 버스에 탑승해 기념사진을 찍던 순간. ©장윤경
예준이의 코로나 19 캠페인 버스는 2년 반 동안 서울지역을 누비는 기적을 만들었다. ©장윤경
예준이의 코로나 19 캠페인 버스는 2년 반 동안 서울지역을 누비는 기적을 만들었다. ©장윤경

그렇게 예준이의 버스는 서울 시내를 누비며 한 달간 버스회사와 광고계약을 했다. 그런데 쉽게 사라질 줄 알았던 코로나가 좀처럼 사라지 않자, 결국 2년 반이란 시간으로 광고는 연장 계약되었다. 한번은 버스를 탈 때 영상 속 아들의 모습을 넋 놓고 바라보다 정류장을 지나쳤지만 그래도 마냥 행복했다. 그해, 교장 선생님 그리고 주변 많은 이들이 예준이 광고를 봤다며 아들을 악수로 응원했으니 다시 추억해도 우리 가족에게 찾아온 작은 기적이 아닌가 싶다.

-장애인 곁을 든든하게 지켜주는 대안언론 에이블뉴스(ablenews.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