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이블뉴스 박지주 칼럼니스트】아이가 태어나던 날, 간호사는 이렇게 말했다. "손가락 발가락 다섯 개씩 다 있어요!" 그 말이 얼마나 자연스럽게 흘러나왔는지, 그 안에 얼마나 많은 것이 담겨 있는지를 그 자리의 누구도 의식하지 못했다. 온전한 신체, 그것이 환영받는 생명의 조건처럼 여겨지는 순간이었다.

나는 장애인이다. 그래서 나는 그 말을 다르게 듣는다.

장애인 자녀를 둔 부모들에게서 이런 말을 종종 듣는다. "내가 무슨 죄가 많아서, 무슨 업이 있어서 장애인을 낳았나." 그 말이 얼마나 깊은 고통에서 나오는지, 나는 안다. 밤을 지새우며 아이 곁을 지킨 그 무게를 함부로 재단할 생각은 없다. 그러나 나는 그 말을 들을 때마다 심연 어딘가에서 울분이 치솟는 것을 억누를 수가 없다.

그 말은 나의 존재를 '죄의 결과', 나의 삶을 '고통의 증거'로 규정하기 때문이다. 사랑에서 나온 말이라도, 그것은 내 실존의 존엄을 뿌리째 흔드는 언어다.

그렇다면, 나는 무슨 죄가 있어서

당신의 논리대로라면, 나도 물어야 한다.

나는 무슨 죄가 있어서 당신의 자녀로, 장애인으로 태어난 겁니까? 당신이 내게 그 말을 돌려준다면 뭐라고 하시겠습니까?

이 질문이 불편하다면, 그것이 바로 핵심이다. 죄와 업보의 언어는 방향을 바꾸는 순간 그 폭력성이 드러난다. 부모를 향할 때는 하소연이 되고, 자녀를 향할 때는 상처가 된다. 그러나 애초에 그 언어 자체가 잘못된 것이다. 장애는 누군가의 죄의 결과가 아니기 때문이다.

특히 자폐 장애인 자녀를 둔 부모들에게 묻고 싶다. 말을 못해도, 표현하지 못해도 아이는 느낀다. 부모의 한숨 속에서, 낮아진 목소리에서, 대화가 멈추는 그 순간에서 아이는 모든 것을 감지한다. 그 아이가 자라며 스스로에게 묻지 않기를 바란다. '나는 태어나서는 안 될 존재였나'라고.

"내가 죄가 많아서 너를 낳았다"는 그 말을, 당신의 아들이, 당신의 딸이 듣는다면 그 아이의 가슴은 어떨까요? 장애 당사자로서 나는 피눈물로 묻고 싶습니다.

검사지 위에 놓인 질문, 나는 태어나도 되는 존재인가

임신 중 이루어지는 수많은 검사들을 생각해보자. 초음파, 양수검사, 기형아 검사. 한번은 담당 의사에게 직접 물었다. "이 검사들을 하는 이유가 정확히 무엇입니까?" 돌아온 답은 간결했다. 혹시 모를 장애를 미리 확인하기 위해서라고.

그 말의 이면에는 선명한 전제가 있다. 장애가 발견되면 임신을 중단할 수 있다는 것. 나는 그 전제가 곧 나 자신을 향한 질문이 된다는 것을 느꼈다. 만약 내가 장애아라는 사실이 미리 알려졌더라면, 나는 이 세상에 존재할 수 있었을까?

여성의 재생산권과 선택의 자유는 반드시 존중받아야 한다. 그러나 동시에 우리 사회가 '장애 없는 아이'를 기준으로 삼는 의료 문화가 장애인의 존재 가치를 어떻게 규정하는지, 우리는 진지하게 물어야 한다. 나는 그날 더 이상 검사를 진행하지 않기로 했다. 어떤 상태로 오든, 생명의 만남은 존엄하게 받아들여야 한다는 믿음 때문이었다.

죽고 싶었던 날, 새벽 청보리밭

새벽청보리밭의 아침햇살 머금은 이슬보석.(AI 활용 생성 이미지) ©박지주
새벽청보리밭의 아침햇살 머금은 이슬보석.(AI 활용 생성 이미지) ©박지주

솔직히 말하겠다. 나도 한때 죽고 싶었다.

왜 나는 못 걷는 것인가. 이렇게 살 바엔 차라리 죽자. 그 생각이 머릿속을 가득 채우던 시절이 있었다. 장애를 원망했고, 내 몸을 저주했고, 세상이 나를 버린 것 같았다. 그 고통은 진짜였다. 그것을 애써 부정하거나 미화하고 싶지 않다.

그 어둠이 가장 짙던 어느 새벽이었다. 문을 열고 밖을 내다보았다. 그런데 눈앞에 청보리밭이 펼쳐져 있었다.

이슬을 머금은 보리 잎 사이로 아침 햇살이 스며들고 있었다. 영롱하게 빛나는 물방울 하나하나가 보석처럼 반짝였다. 세상이 그렇게 아름다운 줄, 그때 처음 알았다.

그 순간, 나는 멈췄다. 그리고 생각했다. 이렇게 아름다운 것들이 이 세상에 가득한데, 나는 왜 그것들을 보지 못하고 내 장애만 탓하고 있었는가.

못 하는 것에 온 마음을 쏟다 보면 할 수 있는 것들이 보이지 않는다. 그날 이후 나는 달라졌다. 장애를 다시 바라보게 되었고, 삶을 대하는 태도가 조금씩 바뀌었다. 결핍에서 눈을 돌려 지금 내 곁에 있는 것들의 소중함을 알게 되었다.

그것이 내가 살아온 방식이다. 쉽게 얻은 태도가 아니다. 죽고 싶던 새벽을 지나, 청보리밭 이슬 속에서 건져 올린 삶의 언어다.

우리 사회의 언어가 바뀌어야 한다

장애를 처음 맞닥뜨렸을 때 '왜 나인가'라고 묻는 것은 자연스러운 반응이다. 그러나 문제는 그 물음이 사회적 언어가 되어버릴 때다. 장애를 죄나 업보로 표현하는 언어는 개인의 감정을 넘어, 장애인을 '결핍된 존재', '불행의 상징'으로 규정하는 사회 인식을 반영하고 강화한다.

장애인을 특수학교에 보내는 것조차 주민 반대에 부딪히고, 장애인 이동권 시위는 '민폐'로 불리며, 장애인 활동지원 예산은 매해 삭감 위기를 맞는다. 이 모든 것의 뿌리에는 장애인의 존재를 사회의 '부담'으로 보는 시선이 있다.

언어는 인식을 만들고, 인식은 제도를 만든다. 장애를 '불행'이나 ''의 언어로 표현하는 한, 장애인이 동등한 시민으로 살아갈 수 있는 사회는 요원하다. 부모의 고통을 표현하는 방식도, 사회가 장애를 바라보는 시선도 달라져야 한다.

그래도, 삶은 아름답다

나는 여전히 이 말을 믿는다. 장애로 겪는 어려움이 삶의 전부가 아니라는 것. 그 삶에도 반드시 귀하고 소중하고 아름다운 일들이 일어난다는 것.

부모에게 묻고 싶다. 당신의 아이가 웃을 때, 손을 내밀 때, 당신을 알아볼 때 그 순간은 죄의 결과입니까? 아니면 그냥, 삶입니까?

나는 내 삶이 누군가의 업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나는 그냥 태어났다. 이 세상을 살아가고 있다. 어렵고 때로는 억울하지만, 그래도 이 세상은 아름답다. 죽고 싶던 그 새벽을 지나 청보리밭에서 그것을 배웠다. 그것을 매일 다시 발견하며 사는 것이 나의 방식이다.

장애인의 삶은 불행의 서사가 아니다. 그것은 하나의 완전한 삶이다. 그 존엄을 죄와 업보의 언어로 훼손할 권리는, 그 누구에게도 없다.

감히.

-장애인 곁을 든든하게 지켜주는 대안언론 에이블뉴스(ablenews.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