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년 1월 4일.

한 해가 시작된 지 고작 나흘 밖에 지나지 않았다. 

일주일 전, 우리는 끔찍한 대형참사와 마주해야했다. 많은 국민들은 아파했고, 분노했고, 과거 세월호와 이태원 참사 때의 트라우마가 올라온다며 괴로워했다. 나 또한 그런 국민 중 한 사람으로 일주일을 살았다. 올해 4일 중 나는 두 번의 장례를 다녀왔다. 두 번 모두 내가 알지 못하는 이의 장례였다. 그럼에도 나는 눈가에 차오르는 눈물을 막기 어려울 만큼 슬프고도 아팠다. 

누군가 세상을 떠나고 그와 작별의식을 치루는 과정에서 우리는 슬픔을 경험한다. 더는 그 사람을 볼 수 없어서, 화해와 용서를 주고받지 못한 미안함에, 그 없이 살아갈 내가 안쓰러워서. 여러 감정과 생각의 원자들이 화학작용을 일으킨 결과물을 우리는 ‘상실감’ 이라 부른다. 상실을 인정하고 고인을 추억하며 마음의 빈칸을 천천히 채워가는 시간을 ‘애도’ 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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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적 재난에 애도할 권리. ©픽사베이

냉정하게 말해 나는 지인을 상실한 것도 아니고 화해와 용서를 구할 일도 없는 관계임에도 왜 그리 슬프고 아팠던 것일까. 1차적으로는 유족들의 아픔에 공감하기에 슬픔을 느꼈을테지만, 내게도 일어날 수 있는 일이라는 공포, 아무도 우리를 지켜주지 않는다는 두려움, 나와 비슷한 무고한 이들이 죽음을 당했다는 분노가 뒤엉킨 감정이었다. 상실감과는 다른 모양의 감정이었다. 때문에 애도의 모양 또한 다를 수 밖에 없다. 

가족과 지인의 상실은 그들을 기억하고 추모하며 애도하지만, 알지 못하는 이의 사회적 죽음은 같은 피해자가 더는 발생하지 않도록 다짐하고 약속하며 유가족과의 심리적 연대 속에 애도하게 된다. 때문에 우리는 사회적 재난 뒤에 ‘잊지 않겠습니다’ 라는 말로 서로를 위로하고, 희생자들을 애도한다. 

2022년 미국에서 발표된 연구(Kinney, K. L.(2022), "Engaging with Discomfort: Thanatological Social Movements and Public Death Education", Journal of Folklore and Education 9.) 에 따르면 ‘사회적 재난 등 죽음에 관련된 억압과 소외된 문화・사회적 삶에서, 죽음을 주제로 한 대화와 교육이 개인과 공동체에 죽음 경험에 대한 이해를 넓힐 수 있다’고 한다.

특히 죽음교육은 사회 구성원들이 죽음과 상실에 대해 자연스럽게 말하고, 이를 두려워하거나 회피하지 않도록 돕는다고 한다. 이를 통해 사회적 태도와 인식을 변화시키고, 유가족의 고통을 이해하며 공감하는 능력을 높이는 데 기여할 수 있다(김경선, 2제10회 한국죽음교육학회 학술대회 발표)고 한다.  우리 모두 아프고 슬픈 만큼 서로의 이야기를 나누고 공론화할 때 성숙한 애도를 할 수 있다는 의미일테다. 

여객기 참사 후 친한 발달장애인분들과 소통할 일이 몇 차례 있었다. 때마침 해가 바뀌는 시기였기에 자연스레 새해 복 많이 받으시라는 인사 차 연락을 주고 받았다. 시기가 시기인지라, 그들도 희생자분들을 안타까워하고, 유가족분들의 슬픔에 공감하면서도 두려움과 무기력함이 혼재되어 어찌할 바를 몰라하는 분들이 많았다. 

하지만 막상 장애인복지 현장에서 들려오는 이야기는 “사회적 충격이 큰 사건에 발달장애인들이 많이 노출되면 불안함과 충격이 더 클 수 있으니 가급적 보여주지 말아라” 라는 의견이 대세였다. 물론, 나이가 어리거나 관련된 트라우마가 있는 발달장애인의 경우 자극적인 내용을 보고 도전적 행동을 보이거나 정서적 불안을 보일 수 있기에 조심할 필요는 분명 있다.

하지만, 단지 발달장애가 있다는 이유만으로 애도할 권리조차 박탈할 권한은 그 누구에게도 없다. 어릴 적부터 ‘장례’ 라는 인간의 보편적 경험에서 조차 배제되고 자극적인 영화와 사건사고를 통해 ‘죽음’을 먼저 알아차린 그들에게는 죽음이 더 두려울 수 밖에 없다. 상실을 인식하고, 아픔에 공감하며, 애도로 회복하는 경험은 자연스럽게 뒤따라오지 못했다. 때문에 사회적 재난에 더 취약하고, 더 큰 충격을 받을 수 밖에 없다. 

우리가 그들을 사회적 재난에 취약하게 만들어놓고 취약하니 더 배제시키는 악순환의 고리에 빠져드는 것이다. 적어도 성인기에 접어든 발달장애인들과는 함께 추모하고 애도하며, 안전한 사회를 위해 무엇을 해야 할까 화두를 던지고, 생각을 나누는 장이 그들에게는 필요하다. 물론 희망하는 당사자에 한해 그들이 수용할 수 있는 속도로 진행되어야 한다. 당사자들을 보호한다는 명분으로 사회적 재난을 보지 못하게 눈을 가리는 것이 아닌, 애도할 권리와 성숙한 시민의 역할을 부여하는 것이 우리가 해야 하는 일이다. 

물론, 이런 고민을 해야 할 이유조차 없는 세상이 된다면 가장 좋겠지만 말이다. 

-장애인 곁을 든든하게 지켜주는 대안언론 에이블뉴스(ablenews.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