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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국대학교 충주병원 장애인친화 산부인과 내부 진료장비와 편의 시설. ©보건복지부

영국 전래동화에 ‘아기 돼지 삼형제’라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막내가 짚으로 집을 지어 늑대의 입김에 집이 날아가 버리고, 둘째는 나무로 집을 지어 입김에 날아가 버립니다. 첫째 돼지 집은 벽돌로 지어 늑대가 허물 수 없어 안전하게 삼형제가 서로 도우며 모여 살았다는 이야기입니다. 게으름을 피우지 말라거나, 만사 튼튼하게 대비하며 살아가라는 교훈이 들어 있습니다.

이를 의료인 입장에서 보면 병원에 가지 않고 민간요법만 믿거나, 전혀 의학적 근거가 없는 미신을 믿으면 생명을 보장할 수 없다는 이야기가 됩니다. 늑대는 바이러스이고, 아기 돼지는 환자로 대치해 생각해 봅시다.

그런데 이 이야기는 의문투성이입니다. 아직 아기인데 엄마 돼지가 독립을 시키겠다며 방법을 충분히 교육 시키지 않고 너무 어린 나이에 위험한 세상으로 내보냈습니다. 즉 병원으로 비유하면 건강교육 없이 환자 탓만 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다음 의문은 게으른 것이 아니라 기술이 부족했던 것입니다. 우리 한옥은 나무로 지어도 튼튼하여 천년을 갑니다. 못 하나 사용하지 않아도 튼튼하고 아름답습니다. 나무는 약하고 벽돌은 강하다는 것은 사람들에게 편견을 가르칠 수도 있습니다. 우리 의학 역시 많은 편견과 오해가 존재합니다. 고혈압약을 오래 먹으면 풍에 걸린다는 등 부작용을 잘못 알거나, 옆집 아저씨가 90세인데 담배를 피우니 담배는 해롭지 않다는 등이 그렇습니다. 이 역시 건강교육이 필요합니다.

셋째 의문은 맏이에게는 재산을 많이 넘겨주어 벽돌로 집을 지을 수 있었고, 둘째와 셋째는 가난하여 생명의 위험을 갖게 되지는 않았나 하는 것입니다. 가부장제가 만든 문제인 것입니다. 게으름의 문제가 아니라 경제적인 것이 문제였을 것이라는 상상입니다.

현대에서 의학은 건강보험과 의료급여, 그리고 자부담 상한제 등으로 경제적 문제가 상당히 해결되고 있지만, 희귀질환 등은 여전히 경제적인 문제가 작용하고 있습니다. 지금은 경제가 아니라 정보의 문제이거나 접근성의 문제가 더 중요한 문제가 아닌가 합니다.

넷째는 동화의 결론 부분에서 각자가 벽돌집을 짓고 살았다는 것이 아니라 모두 함께 벽돌집에 모여서 살았다는 것입니다. 판본에 따라서는 둘째와 막내는 집이 무너질때에 늑대에게 잡아먹히는 것으로 되어 있기는 합니다. 이렇게 이왕 모여 살 것이라면 처음부터 모여 살 것이지, 고생스럽게 각자 집은 왜 지었느냐는 것입니다. 엄마 돼지가 각자 독립하여 살도록 세상에 내보내었다면 실패한 것입니다.

의료인이든, 환자이든 서로 네트워크를 가지고 하나의 우산 아래 질병으로부터 보호받으면서 모여 살아야 합니다. 각자 전문의 자격을 가지고 개별적으로 얼마든지 봉사할 수 있지만, 교육이라는 한 가상공간에 모여 사는 것이 더욱 건강한 세상을 만드는 길입니다.

이솝 이야기 중에 ‘양치기 소년’이 있습니다. 요즘 노동법에 의하면, 양치기 소년은 어린 나이에 노동을 시켜 아동학대에 해당할 것입니다. 높은 산에 올라 혼자 온종일 양을 지키고 있으려니 오죽 심심했을까요? 거짓말을 반복해서 하다가 정말 필요한 때에 거짓말을 또 하는 것으로 오인하여 늑대에게 양을 잡아먹히게 만든 것이 오로지 양치기만의 잘못일까요? 요즘 같으면 스마트폰으로 동영상을 보거나 카톡을 하거나 게임을 했겠죠? 게임에 빠져 양을 제대로 돌보지 않아 늑대에게 잡아먹히는 이야기로 바뀔지도 모르겠습니다.

거짓말을 하면 안 된다는 교훈을 가르치기 위한 이야기이겠으나, 외롭고 심심하게 소년을 방치해 둔 것을 생각하면 소년은 거짓말을 한 것으로 모든 책임을 지고 비난을 받는 것이 억울할 수도 있습니다. 소년은 오랜 방치로 인해 정신적 문제가 있는 환자가 된 것입니다.

의료인은 우리는 항상 현명하고 바른길로 환자를 인도해 주는데, 환자들이 문제가 있어 약을 게을리 먹고, 건강을 제대로 돌보지 않는다고 비난합니다. 마치 소년을 나무라듯이 말입니다. 환자의 입장을 생각하고, 자세히 쉽게 설명해 주고, 친절하게 대하고, 수요자 중심으로 함께 한다면 건강과 의료가 한층 더 발전한 모습이 아닐까 합니다. 이제 우리는 기술의 발전이나 전달체계도 중요하지만, 건강에 대한 관점 즉, 패러다임의 전환이 필요합니다.

저는 선천성 백내장과 안구진탕으로 시각장애 1급입니다. 오른쪽 눈은 망막박리가 청년시절에 와서 불빛도 보지 못합니다. 저는 대구에서 어린 시절을 보내었습니다. 대구가 대도시이기는 하지만 대구에서 가장 변두리에 살았습니다. 지금은 가장 번화가가 되었습니다.

백내장이라는 것은 중학교 3학년 때에 알았습니다. 사형제 중 삼형제가 백내장이었는데, 사람들은 유전이라고 했습니다. 조상 중에는 눈이 나쁜 사람은 없었습니다. 어머니께서 임신 중에 한약을 잘못 먹어서 그렇다고 하는 이도 있었습니다. 삼형제가 모두 한약 탓이라는 것은 설득력이 전혀 없습니다. 유전과 유전성은 다릅니다. 유전은 조상으로부터 물려받는 것이고, 유전성은 물려받는 과정에서 유전인자에 어떤 손상이나 변형이 가해진 경우입니다. 유전성이 원인이라는 것은 설득력이 있어 보입니다.

어떤 이는 제가 태어나 1주일도 되지 않았을 때 옆집 아저씨가 노루를 잡아 껍질을 말린다고 우리집 담벼락에 걸어 두어 부정을 타서 눈이 나빠졌다고 했습니다. 또 어떤 이는 사과를 재배하는 과수원에 물을 대기 위해 물길을 트는 공사를 했는데, 공사장 흙더미에서 핏물이 나오면서 정기가 빠져나가서 눈이 나빠졌다고도 했습니다. 아직도 장애인이나 희귀질환에 대한 온갖 소문들은 여전히 존재합니다.

제가 장애인 등급을 처음 받았을 때에는 4급이었습니다. 대구에서 받았습니다. 대학을 졸업하고 서울로 올라왔습니다. 지하철이 무료여서 장애인수첩을 계속 들고 다니다 보니 흐물흐물해졌습니다. 당시에는 정말로 수첩이었습니다. 마분지 종이로 몇 장이 노트처럼 되어 있었습니다. 새로이 수첩을 발급받기 위해 적십자 병원에 갔습니다.

1990년 당시는 낡은 시설이라 복도는 어두웠고, 전쟁터의 야전병원 같았습니다. 안과가 어디에 있는지 간판이 제대로 보이지 않아 안내를 받아야 했고, 의자에 앉아 순서를 기다렀습니다. 간호사가 저의 이름을 부르며 들어오라고 했습니다. 저는 눈이 보이지 않아 혼자 들어갈 수 없다고 했습니다. 그러자 정말 눈이 보이지 않느냐고 하면서 검사도 하지 않고 1급이라고 했습니다. 지금은 시력이 0.02가 되지 않아 1급입니다. 시력은 원거리 시력이 있고, 근거리 시력이 있습니다. 장애등급 판정에는 원거리 시력만 검사합니다. 시력 외에 시기능과 시효율성이 있지만 등급 검사에는 전혀 고려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돋보기로 책을 보지만 여전히 1급입니다.

제가 코로나가 유행하던 시절에 마스크 공장을 세우고자 허가를 신청하니 의료인이라고 정신감정 검진을 받아 오라고 하더라구요. 법적으로 필수적인 절차이더군요. 법무부 지정 병원에 찾아가서 검진료를 내니 검사를 생략하고 아래위를 한번 훑어보고는 바로 이상이 없다는 진단서를 써 주었습니다. 저는 제대로 진단을 위한 검사를 해야 하지 않느냐고 따졌습니다. 그랬더니 의사 선생님이 웃으시면서 “그렇게 따지시는 것을 보니 제 진단서가 맞네요”라고 하시더군요.

장애인이 병원을 방문하면 편의시설이 부족하여 서로 민망해 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동네 병원 내과는 2층이라 휠체어가 올라갈 수가 없습니다. 엘리베이터가 없는 건물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1층에 있는 병원을 찾았습니다.

건강보험공단에서 건강검진을 받지 않으면 벌금을 내게 할 수도 있다고 하니 귀찮은 검사를 하러 간 것입니다. 그랬더니 화장실에 가서 소변을 받아 오라고 했습니다. 화장실은 건물 뒤로 돌아가 비밀번호를 누르고 턱을 넘어가는 좁은 화장실이었습니다. 할 수 없이 사람들이 지나가는지 살피면서 길거리에서 바지를 내리고 일을 처리했습니다.

혹자는 장애인을 위한 전문병원을 만들어 모든 장애인을 그곳으로 보내면 전문성도 높아지고 서비스 질도 좋아진다고 합니다. 물론 특정 전문성이 필요한 경우는 그렇습니다만, 전국에 산재한 모든 장애인은 이동의 불편함을 감수하고 그곳에만 가야 하며, 그곳으로 가다가 생명을 잃는 경우도 발생할 것입니다.

자폐성 장애인이 이가 아파서 치과에 갔습니다. 의사가 입을 벌리라고 하고 도구를 사용하여 잇몸을 누르자 장애인 환자는 아파서 반사적으로 다리를 들어 의사를 강하게 찼습니다. 그 다음부터 이분은 장애인 환자는 큰 병원으로 가라고 하고 받지 않습니다. 큰 병원에서는 전신마취를 하고 치료를 하는데, 그렇게 하니 환자에게 묻는 문진을 할 수는 없습니다. 어차피 심한 자폐인이라 질문해도 대답은 하지 않겠지만 말입니다.

편의시설의 문제로 진료를 거부하기도 하고, 부가적인 의료적 문제로 거부하기도 합니다. 중증 여성이 임신을 하여 출산을 하기 위해 병원에 갔는데, 너무 중증 장애인이라 다른 합병증이 발생하거나 분만 과정에서 산모와 아기에게 여러 가지 문제를 가질 수도 있어 병원 탓으로 돌릴까 염려되어 거부하기도 합니다.

대학 병원 엘리베이터 버튼 앞에 점자블록이 깔려 있어서 수술 환자가 수술을 마치고 침대에 누워서 나오다가 점자블록으로 인해 덜컹거리는 바람에 주사 바늘이 빠졌다고 합니다. 그 정도의 충격에 주사 바늘이 빠진다면 반창고를 잘못 붙인 것이 아닐까요? 아니면 침대를 밀고 나오는 분이 점자블록을 피해 회전하는 법을 잘 모르지 않았을까요? 점자블록은 엘리베이터 입구 전면에 설치하는 것이 아닙니다. 버튼 바로 앞에 벽으로부터 30센티미터 띄워서 설치합니다. 대학병원의 복도라면 통과폭이 넓어 얼마든지 점자블록을 피해 침대가 이동할 수 있는데, 점자블록 설치하는 법이 잘못이라고 합니다.

히포크라테스 선서는 의료인들에게는 매우 중요합니다. 의료기술은 신이 내린 선물로 고통받는 환자들을 위해 봉사하는 데에 사용하겠다는 선서는 너무나 숭고하고 고귀한 철학입니다. 그런데 선서 마지막에 의술로 가망이 없는 사람에게는 의술을 사용하는 것은 낭비이고, 쓸데 없는 짓이라고 하고 있습니다. 더욱 기술 발전에 노력하여 해결하겠다고 하지 않았고, 장애인에게는 건강권을 포기하게 만들었습니다. 장애인도 평등하고 존중되어야 한다고 하는 현대에도 히포크라테스의 선서 마지막 대목은 여전히 존재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요?

장애인은 편의시설이나 이동권이 제대로 보장되지 않아 병원을 자주 가지 못합니다. 그래서 병이 악화 되어 병원에 가기 때문에 외래 진료는 장애인이 빈도가 낮으며, 입원 빈도가 높아 연간 건강보험료의 사용 금액이 비장애인보다 4배 이상이라고 합니다.

이 통계는 저는 믿지 않습니다. 첫째는 입원을 한 후 퇴원하면 정기적으로 병원 방문을 해야 합니다. 그러면 입원을 하지 않고 외래 진료를 받는 횟수는 적을지라도 퇴원 후 외래횟수는 늘어나므로 외래 진료 빈도수는 오히려 더 높거나, 같을 수도 있을 것입니다.

둘째는 장애인이 아니라 장애인이 된 노인이나 중증 환자가 모두 장애인으로 표기된 결과이지 장애인으로 인해 건강보험료가 올라간다거나 더 많이 장애인이 사용한다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중증 환자가 더 많이 사용하는 것은 당연하고, 그 중증 환자가 장애인 등록을 하여 마치 장애인 전체가 보험료 수혜가 더 높다고 오해하는 것이라 생각됩니다.

물론 장애인 중 선천성 희귀질환자는 병원을 자주 이용할 수 있습니다. 지체장애인은 낙상으로 인한 입원을 더 자주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지적장애인이나 청각장애인이 병원을 더 자주 가지는 않습니다. 시각장애인이 눈을 치료한다고 병원을 자주 가지는 않습니다. 저는 수술 후 눈으로 인해 병원을 간 적이 없습니다.

장애인을 위한 편의시설은 병원에 자주 오지도 않는 장애인을 위해 비용을 사용하라는 것이 아니라 병원 모든 환자는 이동에 어려움이 있으므로 편의시설이 완벽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환자를 위한 병원이 환자에게 불편한 시설을 가지고 있으면 안 됩니다. 장애인에게 편한 시설은 모든 환자에게도 편할 것입니다.

‘장애인 건강권 및 의료접근권 보장에 관한 법률’이 제정되었습니다. 이 법에는 주치의 제도가 있고, 장애인 건강검진 사업이 있고, 장애인 건강관리 사업이 있으며, 건강교육과 재활운동, 연구와 통계사업도 있습니다. 하지만 이 사업으로 장애인의 접근권이나 건강권이 크게 변화되었다고는 생각되지 않습니다.

여성 장애인을 위해 역량강화사업으로 서울에서 뜨개질을 가르치는 사업을 한다고 합시다. 정원이 40명인데 이 사업을 한다고 남녀가 평등하고 여성이 존중되는 사회가 되었다고 여기시지는 않겠지요? 언제, 어디서나, 원하는 프로그램을 이용하는 것에는 아주 거리가 멀며 생색내기나 시범사업에 불과한 것입니다.

이것을 보편적 서비스로 확대하는 것은 여성단체나 교육자, 시민의 공동 책임입니다. 마찬가지로 법에서 정한 필요한 사업들은 의료인과 당사자, 행정가 모두의 책임이며 공동 노력으로 실현 가능할 것입니다.

의료접근성은 곧 행복접근성일 것입니다. 진료 기구를 장애인은 이용할 수 없게 만들어졌다거나, 치과의사가 마스크를 사용하여 구어를 사용하는 청각장애인은 입 모양을 볼 수 없어 소통이 안 된다는 것은 다들 들어보셨을 것입니다. 다양성이 존중되고 의료 서비스가 필요한 사람에게 제대로 전달되고, 직업인이기 이전에 전문가로서 봉사자로서 환자를 이해하고 응대할 때에 존엄성은 지켜질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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