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여 년 가까이 연락을 주고받으며 연간 서너 번 정도 만나는 지인이 있다. 교복을 입고 만난 사이는 아니었지만, 서로에 대한 계산이 크지 않았던 때라 수도권과 대구라는 거리의 차이를 넘어 오랜 시간 만나다 보니, 서로의 이성 친구는 물론이고 금전적으로 어려웠던 시절 이야기 등 다른 사람들에게 쉽게 털어놓지 못할 내용을 함께 나누다 보면, 집에 돌아가는 열차를 타는 시간은 막차에 가까울 때가 많았다.
누군가와의 관계가 오랜 시간 이어지기 위해서는 과거에 대한 이야기 뿐만 아니라 현재에 대한 고민도 공통점이 있어야 하는 법, 이 친구도 40에 가까운 나이가 되면서 세대 차이에서 오는 갈등이 조금씩 깊어졌고, 특히 장애에 대해서 심한 차이를 보이고 있었다.
“성치 않은 몸으로 부모가 걱정하며 잠 못 이루게 하지 말고, 그 시간에 운동을 해서 장애를 극복하고 나면, 그때는 부모와 같이 살겠다고 매달려도 멱살 잡아 내보낼 것”이라는 부모님의 고함소리를 여러 번 들었다고 했다.
거기에 맞서 “이대로 살다가 (부모님) 두 분 다 돌아가시면 그때 나는 천덕꾸러기가 되는 거야. 그땐 내가 무슨 취급을 받던 해주실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는 것”이라고 대답했다는 녀석도 보통은 아니었던 셈이다. 그리고 이러한 다툼은 강함과 약함을 반복하며 3년 가까이 이어졌다.
자식 이기는 부모는 없다고 했던가? “저러다 말겠지”라고 생각했다던 녀석의 부모님은 자신의 인생을 걱정하는 아들의 뜻을 받아들여 “나가는 데에 필요한 모든 절차는 하나부터 열까지 네가 직접 알아보라. 너도 성인이다”라며 자립을 허락했다고 한다. 그래서였을까 올봄에 만났던 녀석의 얼굴에는 웃음이 가득했다. “저 녀석이 결혼을 한다 해도 저런 표정일까” 싶을 정도로 밝은 얼굴이었다.
이후 전화로 소식을 나누었고, 장애는 운동으로 극복해야 한다고 강조했던 부모님을 설득해 활동지원 서비스도 받을 수 있게 되었다. 보조기구 없이 단독 보행이 가능했지만 다리에 힘이부족해 자주 넘어지는 일이 많았었기 때문에 꼭 필요한 서비스였다. 이제는 넘어져도 크게 다칠 확률이 많이 줄어들었다는 안도 때문이었는지 녀석의 활동반경은 이전보다 훨씬 넓어졌고, 붙임성도 좋아 활동지원사와도 큰 무리 없이 지냈다.
그런데 이달 초, 동대구역에서 이 친구를 만나 보니 얼굴에 고민이 가득했다. 이런저런 근황을 나눴지만 뭔가 이야기가 겉도는 느낌이었다. 그리고 활동지원사가 배가 아파 잠시 자리를 비우자 그때서야 자신의 고민을 털어놓았다.
활동지원사와 가까워지면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다 독립에 대한 이야기도 나오게 되었는데 활동지원사가 녀석의 독립에 대해 우려와 걱정을 나타내며 “부모님이랑 계속 살 생각은 없느냐”고 말했다는 것이다.
“내가 24시간 (활동지원을) 받는 것도 아닌데, 혼자 있는 시간에 무슨 사고라도 나면 바로 와줄 사람이 없으니 부모님이 계속 내 걱정을 하신다는 거야. 나한테는 말을 못하고 활보 선생님에게 말한 것 같아. 그 말 들으니 내가 또 나만 생각했나 싶기도 하고. 나도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다. 선생님 말대로 독립하지 말까?”
손 부상은 두려운 것이지만, 그렇다고 독립생활을 포기할 수는 없다. 사진은 지난해 골절로 수술받은 손등. ©정현석
녀석은 독립을 계속 추진해야 할지를 나름 심각하게 고민하고 있었다. 그러나 어떤 활동지원사도 장애인의 독립에 대해 왈가왈부할 수는 없는 일이다. 그리고 사견임을 내세워 당사자에게 강요처럼 비춰 질 수 있는 말도 조심할 필요는 있을 것이다. 그리고 필요하다면 자립생활센터나 복지관 같이 활동지원 서비스를 연결하는 기관에서도 위에서 언급한 내용을 좀 더 주지시켜야 하지 않을지 조심스럽게 권유하고 싶은 마음이 간절하다.
한 사람의 말만 믿고 흔들린 녀석의 잘못도 적지 않은 것 역시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지만, 결국 본인의 인생을 스스로 살기 위해 자립을 결정했다면 어느 정도의 위험은 본인이 감수해야 한다. 겨울에 길이 미끄럽다고 출근을 하지 않는 비장애인은 없으니까.
그밖에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어느덧 집에 갈 시간, 활동지원사와 함께 나서는 녀석의 표정은 여전히 어두웠지만 그가 자신의 인생에 최적화된 답을 찾아가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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