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사회의 복지제도는 최소한의 안전망을 제공하기 위해 설계되어 있다. 특히 기초생활보장제도는 소득과 재산이 일정 기준 이하인 사람들에게 ‘기초생활수급자’라는 자격을 부여하고, 생계비와 의료급여 등 기본적인 삶을 유지할 수 있도록 지원한다.
그런데 역설적이게도, 기초생활수급자로 분류된 장애인들이 ‘일반적인 장애인’보다 더 안정적으로 삶을 이어가는 현실이 벌어지고 있다. 사회적 안전망의 취지가 오히려 수급에서 벗어난 장애인을 더 벼랑 끝으로 내몰고 있는 셈이다.
기초생활수급자가 되면 매달 일정액의 생계급여가 지급되고, 의료비는 거의 전액 지원된다. 주거급여나 교육급여도 받을 수 있다. 즉, 극단적인 빈곤 상황에 처하지 않도록 사회가 최소한의 ‘기본’을 보장하는 것이다.
문제는 바로 이 기준선 위에 아슬아슬하게 걸쳐 있는 수많은 장애인들이다. 이들은 ‘수급 조건에서 초과된’ 사람들이다. 소득이나 재산이 조건에서 아주 조금 초과된다는 이유로 기초생활수급 대상에서 제외되지만, 실제로는 스스로 살아가기엔 턱없이 부족한 환경 속에 놓여 있다. 말하자면, 한 푼이라도 더 벌면 오히려 복지 혜택이 사라져 삶이 더 힘들어지는 기묘한 구조가 만들어진 것이다.
예를 들어 월 80만 원 남짓한 소득이 있다고 가정해보자. 기준선 아래라면 생계급여에 더해 의료급여까지 받아 생활을 이어갈 수 있다. 하지만 그 기준에서 몇 만원만 초과되면, 수급 자격은 박탈되고 생활비와 병원비는 온전히 본인이 감당해야 한다. 결과적으로 기초생활수급자는 안정적으로 약을 먹고 병원을 다닐 수 있는데, ‘조금 더 번’ 장애인은 의료비와 생활비를 감당하지 못해 허덕이며 살아간다. 이는 단순한 제도의 미비를 넘어, 장애인의 삶을 계층 간 불합리하게 갈라놓는 구조적 모순이다.
이 아이러니는 장애인의 노동 현실을 더욱 왜곡시킨다. 기초생활수급자라면 차라리 일하지 않고, 국가의 지원을 받는 것이 생존에 유리하다. 반대로 수급에서 벗어난 장애인은 스스로 살아내야 한다는 이유로 ‘자립’의 책임을 짊어진다. 그러나 이 자립은 실질적인 의미의 경제적 독립이 아니다. 직업 선택은 제한적이고, 근로 환경은 열악하며, 사회적 편견은 여전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복지 지원에서는 ‘너는 이제 자립했으니 지원이 필요 없다’는 낙인이 찍히는 것이다. 결과적으로 이들은 ‘열심히 벌수록 더 가난해지는’ 상황에 놓인다.
한 장애인 당사자는 이렇게 말했다. “차라리 기초생활수급자가 되고 싶어요. 수급자가 아니면 모든 걸 스스로 감당해야 하는데, 현실은 벌어도 벌어도 모자라거든요. 병원비 한 번 나오면 월급은 다 사라져요.”
이 말은 단순한 하소연이 아니라 한국 복지제도의 구조적 결함을 드러내는 절규다. 복지의 안전망이 모두를 지켜주지 못하고, 어떤 이들에겐 오히려 벽이 되어버리는 상황. 이보다 더 모순적인 사회가 있을까.
장애인 당사자들의 삶은 늘 ‘계산’ 속에서 이루어진다. 한 달에 얼마를 벌면, 어떤 급여가 끊기고, 병원비는 얼마가 나가며, 남는 돈은 얼마인지. 결국 돈을 조금이라도 더 벌면, 잃는 것이 훨씬 커진다. 이 때문에 많은 장애인이 일하기를 주저하고, 일부러 소득을 줄이며, 기초생활수급자로 남기를 택한다. 제도가 의도하지 않았던 결과가 사람들의 삶을 옥죄는 것이다.
이 구조가 유지되는 한, 장애인의 노동은 사회속으로 흡수될 수 없다. 노동은 자립의 수단이 아니라 생존을 위협하는 리스크가 된다. 장애인에게 ‘일하라, 자립하라’는 사회의 요구는 공허한 메아리일 뿐이다. 정작 제도는 일하려는 사람에게 불이익을 주고, 일하지 않는 이들에게 상대적으로 안정적인 삶을 보장한다. 이런 모순은 장애인을 복지의 수혜자와 탈락자로 이분화하고, 스스로 살아가려는 사람을 오히려 더 힘들게 만든다.
이제는 물어야 할 때다. 기초생활수급제도의 기준은 누구를 위해 있는가? 복지의 목표는 ‘최저 생계유지’에서 머물러서는 안 된다. 최소한, 수급에서 벗어난 장애인들이 더 가난해지지 않도록 하는 제도가 필요하다. 중간 단계의 지원, 혹은 소득 역전 현상을 막을 장치가 마련돼야 한다. 그래야만 장애인이 ‘열심히 살아가는 것’이 아이러니가 아니라 정당한 삶의 방식이 될 수 있다.
장애인 복지 정책은 숫자로 계산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개인의 삶의 질, 사회 참여, 인간다운 생활이라는 더 큰 맥락 속에서 고민되어야 한다. 지금처럼 ‘기준선’에만 매달린 제도는 그 선 위의 사람들을 더 힘들게 할 뿐이다.
기초생활수급자라는 이름으로 최소한의 안전망을 제공한다는 명분은 중요하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장애인의 삶을 지탱할 수 없다. 장애인에게는 안정적인 일자리, 추가 비용을 보장하는 제도, 그리고 무엇보다 ‘일해도 손해 보지 않는 구조’가 필요하다.
“차라리 수급자가 낫다”라는 말이 나오는 사회는 건강하지 않다. 장애인이 자립하려는 노력을 할수록 불안정해진다면, 우리는 복지국가라 부를 자격이 없는 것이다. 한국 사회가 진정으로 포용적인 복지국가로 나아가려면, ‘기초생활’이라는 이름의 벽을 넘어, 그 벽에 걸린 수많은 평범한 장애인들의 삶을 직시해야 한다.
결국 문제의 핵심은 ‘안정성’이다. 기초생활수급자는 제도의 안전망 속에서 하루를 이어가지만, 그 바로 위에 선 평범한 장애인들은 안정성을 상실한 채 살아간다. 복지의 아이러니 속에서 오늘도 누군가는 하루를 버티고, 또 누군가는 제도의 사각지대에서 무너지고 있다. 더 이상 장애인의 삶이 제도의 계산법에 갇혀서는 안 된다. 복지는 벽을 세우는 것이 아니라, 다리를 놓는 것이어야 한다.
*이 글은 김양희 님이 보내온 글입니다. 에이블뉴스는 언제나 애독자 여러분들의 기고를 환영합니다. 에이블뉴스 편집국(02-792-7166)으로 전화 연락을 주시면 안내해 드립니다.
-장애인 곁을 든든하게 지켜주는 대안언론 에이블뉴스(ablenews.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