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우리는 여러 형태로 이루어진 연결들 속 사회에서 살아간다고 할 수 있다. © pixabay
많은 정신적 장애인들에게 놓여 있는 입장
【에이블뉴스 김세이 칼럼니스트】고립. 참으로 무겁고 어두운 단어다. 또한 많은 정신적 장애인이 겪게 되거나 겪어본 일일 것이다. 단순하게 친구를 사귀기 어렵고 외톨이가 되는 인간관계에서의 고립도 물론 포함된다. 그러나 정신적 장애에 있어서의 고립은 보다 폭넓게 정의된다고 할 수 있다.
이 주제로 글을 쓰는 데 앞서 고민이 하나 있었다. 자폐 스펙트럼 등의 발달장애인과 정신장애인이 겪는 고립 사이에는 경험 내지는 맥락의 차이가 있지 않을까 싶은 것이었다. 이걸 지나치게 동일시해서 보게 되는 것이 아닐까 하는 우려가 바로 그것이었다.
실제로 그런 차이는 발생하고, 그것을 짚어보는 것도 중요할 수 있다. 그렇지만, 사회기술 이슈와 고립의 문제가 오히려 공통된 결로 작용하고 있는 것 또한 분명한 사실이었다. 당사자를 배제시키는 환경, 부정적인 피드백이 익숙해지면서 인간관계와 사회를 회피하게끔 되는 악순환적인 과정 등이 그러했다.
이렇듯 단순히 두 유형의 중복 당사자의 경우로 한정하지 않더라도 정신적 장애인들에게 공통적으로 적용되는 현상에 주목할 여지는 충분했다. 사회적 상황에서 적시의 타이밍에 적절한 행동을 사회로부터 요구받는 사회기술에서 또한 그러한 경향을 보였다.
힘들게 사는 원인이라는 사회기술과 사회성. 그것은 무엇인가?
사회기술(social skills)이라는 말과 사회성이라는 말은 비슷한 의미인 듯이 쓰이는 경우가 많고 실제로도 유사한 점이 많다. 그렇지만 잘 짚어보면 차이점도 발견할 수 있다.
앞서 언급했듯 사회기술은 사회적 상황에서 적시에 적절한 행동을 하는 구체적인 기술과 그 수행 능력을 지칭한다. 그런 한편 사회성은 인간이 서로 연결된 관계와 감정적 유대를 가지고 그럴 수 있도록 하는 성향으로써 기술보다는 정서적이고 문화적인 의미를 가진다.
여기서는 정신적 장애인이 사회 진출에 겪는 어려움의 직접적인 맥락을 표현하기 위해 사회기술 쪽을 제목으로 정하고 주로 다루지만, 정신적 장애 당사자 개인의 '부족함' 내지는 '잘못됨'에만 초점이 맞춰지는 것을 경계하며 문제를 풀어가보려 한다.
실제로 사회기술과 사회성은 정신적 장애를 가진 당사자들 간의 자조모임이나 단체에서마저도 그 존재 유지를 위해 어느 정도 구성원 약속으로써 불가피한 위치를 차지하는 것이 분명한 사실이다. 비록 이것이 조금의 이상함을 관용하지 않는 비장애인들의 사회와 온전히 같지는 않겠더라도 말이다.
그러나 그와 동시에 장애를 가진 개인에게 인간과 사회에 접근하는 것을 원천 배제시키는 것을 정당화하고 있기도 하다. 장애인 차별에 해당하는 접근성 박탈, 기회 박탈의 장치로도 분명 작용하고 있는 것이다. 양극단의 두 예시지만 사회기술이라는 것은 한 방향으로만 바라볼 문제가 결코 아니라는 예시로 충분하다.
당장의 고립된 사람도 존재의 존중을 회복받게끔
그렇다고 이것이 정신적 장애인들에게 노력해서 사회성을 배우고 친구를 사귀자 같은 간단한 말로 정리될 수 있는 문제는 아닐 것이다. 이 문제는 실존하는 장애인 차별과도 연관되어 있고, 장애인 차별이 쉽게 정당화되고 있는 지점이기도 하다.
정신적 장애인에게 사회기술과 사회성을 익힐 기회가 주어지는 것은 좋은 취지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부정적인 경험의 반복으로 고립에 빠진 상태에서 일차적으로 당사자가 상황을 급격히 바꾸려고 적극적으로 나서기에도 무기력에 빠진 경우가 많다는 점을 간과할 수는 없다.
누구에게도 인정받아본 경험을 갖기 힘들고, 누구에게도 호감과 긍정적인 평가를 받아볼 수 없던 사람들이 정신적 장애인 중에는 많다. 이렇듯 긍정적 경험을 스스로에게서는 가뭄에 콩 나듯 찾기도 힘든 이들에게는 주변 인간관계와 사회에 맞물려 돌아가는 감조차 당연하지 않을 것이다.
고립을 겪는 사람을 무리하게 시작부터 다 긍정하거나, 당사자가 그렇게 해야 한다는 말은 아니다. 일단은 당사자 스스로의 입장에서 있는 그대로를 받아들이고, 있는 그대로의 존중을 받을 수 있는 위치를 회복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 중요하다.
정상성이 되지 못하더라도, 자기 속도와 방식으로 하는 말은 분명 그 중요성이 있다. 그것이 내면의 불안감일 수도 있고 사회적 연결에 대한 바람일 수도 있다. 혹은 당장의 자극에 대한 불편감일 수도 있다.
어떻든 당장의 사회기술적으로 미흡한 표현이라도, 사회에서의 낙인과 배제로 이어지지 않도록 하는 따뜻하고 관용적인 기회가 많이 주어져야 한다. 정서적이고 문화적인 사회성은 그 자리에 있는 채 사람의 적응만 기다리는 게 아니라, 감정적 유대와 포용의 자세로 움직일 수 있는 것이다.
연결될 수 있는 구조를 찾으며 정신적 장애인 운동의 갈 길을 탐구하기
앞서 살펴본 부분들을 통해 이러한 고립 현상은 자폐 스펙트럼 류의 발달장애인 범주 뿐만이 아니라 정신장애인을 비롯한 다양한 정신적 장애 스펙트럼에 걸쳐 존재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그렇다. 우리는 여러 형태로 이루어진 연결들 속 사회에서 살아간다고 할 수 있다. 어떨 때는 '요령 좋은' 사회기술이라고 여겨지는 것들 사이의 문제점을 신랄히 비난하다가도 그 사회기술을 익혀 내 인간관계가 좋아지길 바랄 수 있는 것도 그런 면에서 모순으로만 볼 수 없는 본성인 것이다.
정신적 장애인 운동이라 하면 단연 신경다양성을 빼고 이야기할 수는 없다. 신경다양성은 단순히 존재하기 때문에 지켜져야 하는 성역이라기보다는 신경다양인의 특성이며 동시에 다양성이라는 점에 초점이 맞춰져야 한다.
단순히 사회기술을 애써 습득하자는 것도, 사회기술을 애써 거부하자는 것도 정신적 장애인에 대한 온전하고 올바른 이해가 될 수는 없는 것이다. 정신적 장애인끼리도 사회기술 이슈로 소통이 잘 안 되는 경우는 물론 많다. 자폐 스펙트럼의 경우에는 이중공감문제에 대한 회의로 향하기도 한다.
나는 '그래도 된다.'고 하려고 한다. 장애에 대해서도 본질을 찾고, 연대를 찾아야 한다. 정신적 장애인들이 어떤 차별적 구조 속에, 어떤 어려움 속에, 어떤 배제와 고립 속에 처해져 있는가를 보아야 한다.
당당히 자신의 목소리를 내는 이들도, 그럴 역량을 갖지 못한 이들도 동료로 함께할 수 있을 때 포용은 시작될 것이라고 생각한다. 사회기술은 단연 정신적 장애인 당사자들 사이에서도 유효하기에, 오히려 더욱 포용의 미래를 함께하고 또 기대해 바라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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