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교사의 교권침해와 학생의 인권침해 논란은 통합학교만이 아니라 특수학교 역시 그 중심에 서 있다. 서울맹학교 이영미 교감 선생님 역시 교직 39년 중에서 가장 힘든 시기였다고 말한다.

올해 여름은 이 교감에게도 참으로 힘든 계절이었다. 그런데 가을비 끝에 청량한 날씨에 맑은 하늘이 고운 어느 날, 뜻밖의 전화를 받았다. 한빛맹학교 교장 선생님의 전화였다. 업무적인 일로 전화를 했겠거니 하면서 인사를 하였는데, 초등학교는 한빛맹학교를 졸업했고, 중고등학교는 서울맹학교를 졸업한 이은희란 분을 아느냐는 것이었다.

그 물음에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아버님이 목사님이시고, 저와 대학을 같이 다녔던 이은희는 아는데, 하지만 그분은 이 세상 분이 아니라서”라고 했더니 “네 맞아요. 그분의 부모님이 지금 같이 계시는데 맹학교 근처라 만나고 싶다고 하시니 어디로 가면 되겠냐?”고 했다.

교무실로 오시라 하였지만, 꿈을 꾸는 듯 믿기지 않은 상황에, 최근 은희 동창을 떠올렸던 생각을 하니 이 교감은 몸에 전율이 일었다. 이 교감이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이은희라는 대학 동창을 안다고 했던 건, 최근 대학에서 특수교사 지망생에게 ‘시각장애학생 교육’ 강의를 하면서, 나의 대학 시절과 지금 대학생들의 생활을 비춰보게 되었고, 그 당시 함께 했던 시각장애 동창들을 떠올리며 ‘시각장애 교육’을 선택한 계기를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특수교육 중에서 ‘시각장애 교육’은 교사의 사명감을 향상 시키고, 보람을 찾을 수 있

대학 시절에 같은 과에는 시각장애 남학생 둘과 여학생 한 명이 있었는데, 그 여학생이 이은희였으니 잊을 수 없는 친구였다. 그 당시 시각장애학생이 대학 다니기는 쉽지 않았다. 모든 교재는 각자가 알아서 녹음이나 점역을 해야 했고, 과제 또한 대필의 도움이 필요했다. 그래서 동아리 선배의 부탁으로 시각장애학생의 일부 교재를 녹음하거나, 영문 교재는 퍼킨스 점자 타자기로 점역하고, 과제는 같이 읽으면서 묵자타자기로 쓰거나, 심지어 시험 때는 대독을 하며 대필하는 봉사를 한 것이다. 이러한 인연으로 마치 운명인 듯 31년을 서울맹학교에서 시각장애학생과 함께 하게 된 것이다.

대학교 1학년 때 맺어진 은희와의 인연은 은희가 건강이 좋지 않아 휴학하면서 중단되었고, 결국 유명을 달리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3학년 때 서울로 시각장애기관 견학을 왔을 때, 늘 은희를 강의실에 데려다주고 함께 다녔던 남학생이, 은희 부모님께 연락했는데 집으로 오라고 하셨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같이 가서 위로해 드리자며 알려주신 주소를 찾아 집으로 가서 부모님을 뵈었는데 교회 사택이었고, 어머니께서 무척 반겨 주시면서 눈물을 많이 흘렸던 기억이 났다.

그렇게 은희와의 인연이 끝인 줄 알았는데 마치 꿈같은 비현실적인 상황에 교무실로 들어오시는 은희 부모님을 뵙게 되니, 마치 꿈을 꾸는 듯 친구를 만난 듯 뭐라 표현할 수 없는 기쁨과 감사함이 벅참으로 몰려왔다. 제 모습을 본 아버님은 꽃다운 어린 숙녀가 늙은 중년의 모습이 되었다며, 40년 전 집으로 왔을 때 정씨 성을 가진 남학생과 같이 왔고, 전공 교과목이 ‘지리’로 기억된다는 말씀과 덧붙여 “은희가 대학 다닐 때 도와주었던 일을 잊을 수 없고 늦었지만 고맙다”고 하셨다.

어머님께서는 “한 시도 맹학교를 잊은 적이 없고, 시각장애라는 말만 들어도 남의 일 같지 않고, 관심을 가지게 된다. 시각장애 아이를 키워봐서 아는데, 학교에서 시각장애 학생 가르치는 선생님들께 늘 감사한 마음을 가지고 있고, 기도하고 있다”라는 말씀에서 그 많은 세월에도 깊게 각인된 자식 사랑이 뼈에 사무치도록 전해졌다.

이 교감은 그때 같이 갔던 정씨 성을 가진 남학생이 늘 은희를 교실로 데리고 다녔고, 이름은 정지훈이며, 지금 자신의 남편이라고 했더니 어쩐지 둘이 낌새가 달랐다고 하시며 그때의 상황을 정확하게 기억하셨다. 헤어지기 전에 아버님께서는 서울 오시는 게 쉽지 않다며, 정지훈과도 만나기를 원하셔서 마침 가까운 곳에 있어 만나게 되었고, 감격의 재회로 짧은 시간이지만 은희와의 추억담을 나누셨다.

아버님은 ‘소방관 목사’라는 별명이 붙을 만큼 어려운 교회를 해결해 주시고, 그 교회가 안정되면 또 다른 어려운 교회를 부흥하며, 홍콩에서도 사목하셨단다. 20년을 채워야 원로 목사가 되는 걸 다 마다하며, 여기저기 어려운 교회를 도와주시는 선한 목자시라고 어머님이 말씀하셨다. 지금은 20년을 채우지 않았는데 원로 목사 대우를 받으며 경상남도 김해에 사신다는 것이었다.

한참 만남의 회포를 풀고 있을 즈음 아버님께서 사실 서울맹학교를 오게 된 이유를 말씀하셨다. 아버님 연세 89세, 어머님 연세 86세에 마지막 정리를 하려고 하니, 은희와 정리해야 할 것이 있어 맹학교를 찾아왔다는 것이었다. 은희를 생각하며 은희의 짧은 인생에서 은희를 도와준 선생님과 교육시켜준 학교에 대한 고마움을 전하고자, 적금을 들어가며 어렵게 1억 원을 마련했고, 각 오천만 원씩 한빛맹학교와 서울맹학교에 주신다며, 주머니에서 수표 한 장을 꺼내어 주시는 것이었다.

너무 당황이 되어 교장선생님께 교무실로 귀한 손님이 기다리시니 오시라고 하여, 아무 조건 없이 학생들을 위해 써 달라며 주시는, 그 소중한 오천만 원을 받게 된 것이다.

b4c5dd28ce0c07d94fc3301ae6c79dd9_1699842071_2894.jpg

기금을 전달하고 학교 복도에서 기념사진 한 컷. 좌로부터 이영미 교감, 이선 목사, 오정인 사모, 조양숙 서울맹학교 교장. ©서인환]

그냥 뵙는 것만으로도 가슴 벅찬 데, 목회자로 봉사하며 사신 그 삶 가운데, 천둥 번개 비바람 치는 여름날을 겪은 열매가 가을이면 튼실하게 무르익듯이, 오랜 세월 큰딸을 아프게 가슴에 품고 얼마나 많은 아픔을 견디며 사랑이 영글어 가게 하셨을까 생각하니, 애써 참으려고 해도 쏟아지는 눈물을 멈출 수 없었다.

서울맹학교에는 학교에 대한 고마움으로, 장학금과 발전기금을 기부하시는 동창분이 정말 많고 미담도 많다. 재활하게 해 준 학교가 고맙다며, 어려운 형편에도 마음을 담아 매달 장학금을 전하는 제자들도 여럿이다. 한 분 한 분의 마음이 다 소중하기에, 이 교감 또한 서울맹학교 가족으로서 무엇을 해야 하고, 어떻게 살아야 하나를 생각하는 계기가 되었다.

숙성한 사랑의 계절 가을에, 오래 발효시킨 와인 맛과도 같은 귀중한, 은희 부모님의 딸에 대한 사랑은 모교 사랑으로 이어져, 짙은 어둠에 작은 불빛이 엄청난 빛의 가치를 발휘하듯, 어두운 교육 현실을 환히 밝히는 빛으로 와 닿았다. 학부모의 악성 민원과 학폭, 아동학대라는 걸림돌로 인해 교권이 붕괴된 현장에서 몸으로 부대끼며 힘들 때 후배 교사들에게 해 줄 말이 없어 가슴 아리고, 교사 지망생들에는 더욱 할 말을 찾지 못하며 절망하고 있을 때, 은희 부모님의 사랑은 그동안 앙금으로 남아있던 묵은 체증을 깨끗이 치유하는 위로의 빛이 되었다.

떨어지기 전 아름다움을 풍기며 다음 세대를 준비하는 색색의 나뭇잎을 보면서, 아름답고 풍요로워 사랑하지 아니할 수 없는 계절에, 멋지게 실천적 선한 삶을 사시는 이선 목사님과 오정인 사모님께 감히 말로 다 표현할 수 없는 감사의 마음을 이 글에 담는다.

이제 연로하셔서 딸을 만나러 가기 전에 해야 할 일, 그것은 딸 이은희를 키워 준 학교를 위해 감사의 뜻을 전하는 것이었다. 그것이 시각장애인 딸을 먼저 하늘로 보낸 부모가 세상에서 마지막으로 정리해야 했던 일이었던 것이다.

서울맹학교에는 삼윤장학금이 있다. 삼풍백화점 붕괴사고로 돌아가신 시각장애인 딸(당시 서울맹학교 교사)과 그 자매들의 보상금으로 후배 시각장애 학생들에게 장학사업을 하는 기금이다. 이 기금을 서울맹학교에 기탁한 아버지(정광진 변호사)의 마음도 이은희 부모의 마음과 다르지 않았을 것이다.

-장애인 곁을 든든하게 지켜주는 대안언론 에이블뉴스(ablenews.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