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이블뉴스 이현옥 칼럼니스트】 우리나라 올림픽 첫 메달은 1976년 몬트리올 대회 레슬링의 양정모 선수이다. 그러나 올림픽보다 앞서 1972년 하이델베르크 패럴림픽에서 탁구 송신남 선수가 금메달을 딴 것은 대중에게 잘 알려져 있지 않은 사실이다. 송신남 선수는 월남전 참전 상이군인 출신으로 우리나라 장애인체육 역사에서 상이군경의 역할은 큰 족적을 남기고 있다.

f8355c1b09b2163c71c321eb8598ad79_1754271418_163.jpg

하이델베르크 패럴림픽에서 첫메달을 딴 송신남 선수의 귀국 환영행사 모습. ⓒ대한장애인체육회

장애인스포츠 시작은 1961년 군사원호청의 창설을 그 시작으로 보고 있다. 지금의 국가보훈부 전신이다. 우리나라는 1965년 패럴림픽의 시작인 국제척수장애인경기대회에 처음 참가하고, 이후 1967년 현재 상이군경체육대회의 전신인 ‘전국 척수장애 상이용사 체육대회’가 개최되기에 이르렀다. 이 모든 대회의 참가와 선수 육성에는 상이군경이 중심되었다. 현재 전국 순회 개최를 하고 있는 전국장애인체육대회도 그 시작은 성남에 있던 국군상무대를 기반으로 이루어졌는데 이 과정에서 상이군경회의 역할이 컸다고 본다.

 상이군경회 발족이후 1960년대와 70년대에 시각장애학생 야구, 유도, 탁구대회와 서울농학교 배구부가 창단되고, 이후 1975년 한국소아마비협회 ‘정립회관’이 건립되어 체육수업에 어려움이 있는 장애학생의 체육교과를 담당해 상당수의 장애인선수를 배출하는 산실이 되었다.  월남전 상훈 이전에도 우리에게는 6.25 한국전이라는 아픔이 있었는데, 우리나라 장애인체육 역사에서 아무래도 전쟁이라는 비극으로 장애를 얻게 된 선수, 이들에 대한 기록을 빼놓을 수 없다.

 장애인체육의 역사에서 상이군경의 역할과 기여는 아무리 강조해도 과하지 않다. 탁구 송신남이 첫메달을 딴 하이델베르크 패럴림픽은 우리나라가 두 번째로 참가한 패럴림픽으로 금메달 4개를 포함 총 7개의 메달을 땄는데, 당시 메달리스트 중 한 여성선수의 이름이 눈에 띈다. 사실 요즘도 여성선수는 그 존재 자체가 귀해서 국제패럴림픽위원회(IPC)가 가산점도 주고 참가 쿼터 범위를 넓히고 해도 숫자가 올라가지 않는 어려운 과제인데, 도대체 어떻게 50여년 전의 한국에서 여성 장애인선수가 있었는지 개인적으로도 궁금했다.

1976년 하이델베르크 패럴림픽 공식 포스터. ©ipc 
1976년 하이델베르크 패럴림픽 공식 포스터. ©ipc 

 주인공은 바로 양궁 종목의 조금임 선수이다이 선수는 하이델베르크 패럴림픽에서 양궁 휠체어2등급(ARW2) 개인전 금메달과 남자선수와 조를 이룬 단체전에서 은메달을 땄다. 정확한 기록이 안남아서 그렇지 사실 여자 양궁의 전설 김수녕을 능가하는 인물이라고 할 수 있다.

이 선수가 진정 위대했던 것은 간호전문대 출신으로 서른한살의 나이로 6.25가 터지자 간호장교로 전장에 나갔는데, 타고 가던 수송차량이 뒤집히는 바람에 척수장애를 입고 하반신을 쓰지 못하는 중증장애인으로 활시위를 당겼다는 것이다. 상이군경 출신으로 한국의 첫 여성 장애인선수였고, 당시만 해도 여성에다 장애인이라는 편견에 무너지지 않고 국제대회에 나가 정확하게 과녁을 맞춰 금메달을 조준한 궁사였다는 점이 놀랍기만 하다. 조금임은 사고 이후 소령으로 진급하며 군에서 전역한 예비역이기도 하다.

사실 조금임선수는 세상에 알려진 사연이 더 드라마틱 하다. 지난 2014년 한 언론을 통해 평생  모은 재산 7억원을 장학금으로 사회에 기부한 미담이 실리며 패럴림픽 메달리스트 출신이라는 점이 알려지게 되었다. 조금임은 3·1운동이 일어난 1919년 전북 군산에서 태어나 초등학교를 마치고 일본으로 건너가 나가사키에서 조산간호전문대학교를 졸업했다. 이후 광복이 되자 귀국해 국군 창설과 함께 여군이 되었다고 한다.

불의의 사고로 장애를 얻어 전역한 뒤 누워만 있던 중 ‘애국하는 방법이 전선에만 있는게 아니다’라는 생각으로 서울 대방동에 지어진 ‘재활용사촌’에 나가 일하기 시작했는데, 이곳에서 군용 양말과 장갑 만드는 일을 하며 한푼두푼 악착같이 돈을 모았다고 한다. 결혼도 하지 않고 혼자 휠체어에 의지한채 지내며 어렵게 생활했는데, 국가유공자로 인정받아 나라에서 연금이 나왔지만 평생 먹고 싶은거, 입고 싶은거에 일체 돈을 쓰지 않고 근검절약하는 삶을 살았다고 한다. 당시에는 패럴림픽 메달연금도 사실 액수가 변변치 않았던 상황이었다.

 이렇게 열심히 살며 지난 2014년 여신장학회에 1억 9500만원, 초록우산어린이재단에 500만원 등 총 2억원을 기탁했는데, 이미 그 이전에 여신장학회에 5억원을 기부한 바 있어서 평생 어렵게 모은 7억원을 모두 기부한 셈이 되었다. 장애인스포츠계에도 평생 모은 재산을 사회에 기부하는 ‘김밥할머니’가 있었던 것이다. 여신장학회 측은 이 기부금을 고교생과 대학생들에게 장학금으로 지원했고 초록어린이재단은 생활이 어려운 어린이들의 교복비로 사용했다고 알려졌다.

패럴림픽 첫 금메달리스트 송신남(사진 왼쪽)과 첫 여성장애인 메달리스터 조금임(오른쪽). ©대한장애인체육회 블로그 캡처


패럴림픽 첫 금메달리스트 송신남(사진 왼쪽)과 첫 여성장애인 메달리스터 조금임(오른쪽). ©대한장애인체육회 블로그 캡처
​

 휠체어 없이는 생활이 안되는 중증장애를 입은 간호장교 출신 상이군이 그 어렵던 시절에 어떻게 운동을 하게 됐을까? 원로가 드문 장애인체육계에 진정 존경받을만한 어른이라고 할 수 있는 예비역 조금임은 하반신이 불편한 어려운 상황이었지만 운동을 열심히 해 장애인 국가대표로 선발되어 1967년 영국에서 열린 장애인 세계탁구대회에서 우승해 카퍼레이드도 하고 우승소식이 신문에 실리기도 한 것으로 기록이 남아 있다.

1972년 하이델베르크 패럴림픽 메달리스트들이 카퍼레이드를 처음 한 것으로 알려져 있지만, 사실은 그보다 5년 앞서 조금임의 카퍼레이드가 있었던 것이다. 조금임의 인생스토리에 감동해 당시에 육영수 여사가 자신이 읽던 잡지를 보내주었다는 일화도 있다.

장학금 기부 소식이 알려지고 언론사 기자가 취재차 전화를 했을 당시에 “뭐 큰 일도 아닌데 알려지는게 부담스럽다”며 서둘러 전화를 끊었다고 한다. 인생의 마지막까지 어려운 아이들을 돕는 것이 꿈이었다는게 후원금을 받은 장학재단 관계자의 전언이고 “작은 정성이지만 본인이 나고 자란 지역의 인재를 키우는데 도움이 됐으면 좋겠다”라는 뜻도 같이 밝혔다고 한다.

장애여성으로서 본인의 인생도 많은 어려움이 있었을텐데, 사회의 귀감이 되는 인물로서 전쟁으로 자신의 몸을 첫 번째 헌신했고 두 번째 어려운 처지의 청소년들을 위해 평생의 노고를 장학금으로 내주었으니, 나라를 두 번이나 구한 인물이라 하겠다. 패럴림픽에 참가하는 우리나라 여성선수는 이후로는 기록이 없다가 1988년 서울패럴림픽 때부터 조금씩 명단이 보여지고 있다. 88 서울패럴림픽은 사실 국가 차원의 선수 발굴이 이루어졌다는 점에 비추어 보면, 70년대 초반 양궁 조금임의 메달은 그 가치와 무게가 현재와 비교할 수 없을만큼 중요하고 무겁다고 하겠다.

 지난해 파리 패럴림픽은 남녀 선수의 성비를 동일하게 가져가며 양성평등을 기치로 삼은 대회였다. 다가오는 2028 LA패럴림픽은 여성 선수의 숫자가 오히려 남성선수를 뛰어넘을 것으로 예측되고 있다. 예비역 여성 장애인선수 조금임, 그의 기상을 이어받은 우리 선수들의 선전이 한인들의 도시 LA에서 제대로 펼쳐지기를 기대해 본다.

-장애인 곁을 든든하게 지켜주는 대안언론 에이블뉴스(ablenews.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