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한국장애인재활협회와 신한금융그룹이 함께하는 장애청년 해외연수 프로그램 ‘2023년 장애청년드림팀 6대륙에 도전하다’를 끝마쳤다.

장애청년드림팀은 지난 2005년 시작된 국내 최초의 장애청년 해외연수 프로그램으로 연수 비용을 전액 지원하며, 지금까지 996명의 청년들이 참여해 37개국을 살펴보고 개선 방향을 국내에 전하는 전도사 역할을 수행해왔다.

올해로 1,000번째 도전자를 맞이한 장애청년드림팀은 이제 일상에서 떼어낼 수 없는 디지털IT 기술을 모두가 누리고 삶의 기회를 확대할 수 있도록 해외사례를 조사해 청년의 인식을 확대하고 국내의 발전 방향을 모색하고자 ‘Digital IT for Humanity!’를 대주제로 선정한 뒤 6개 팀이 미국, 캐나다, 독일, 일본 등으로 연수를 다녀왔다.

6개 팀 중 장애청년과 비장애청년 각 1명이 팀을 이루어 도전하고픈 해외 장애 이슈로 연수를 떠난 자유연수 3팀의 기고를 연재한다. 첫 번째는 독일 연수를 마친 ‘중장비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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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8월 1일부터 6일 ‘대학 내 장벽없는 삶의 양식’을 주제로 독일 마르부르크 연수를 다녀온 중장비팀. 사진은 마르부르크 장애자문위원회와의 인터뷰를 마치고 중장비 팀원(사진 첫줄) 두 명과 바하딘 바트마즈(사진 뒷줄 왼편), 다고 셸린(사진 뒷줄 오른편)이 함께 하고 있다. ©한국장애인재활협회

연수 2일차 오후, 바하딘 바트마즈(Bahaddin Batmaz)씨와 인터뷰를 위해 바리오 산토(Barrio Santo) 레스토랑으로 이동했다. 그 레스토랑은 바하딘씨가 우리를 배려해 선정한 곳으로, 휠체어 접근이 용이 하고 방문객도 찾기 쉬운 곳에 위치해 있었다. 오후 5시 바하딘씨와 영어 인터뷰를 도와줄 영화 제작자 및 미디어 연구원인 다고 셸린(Dago Schelin)씨를 만날 수 있었다.

우리는 대학도시인 마르부르크 지역사회의 장애 인식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자 했다. 동시에 장애의 정치적 대표성이 보장되는 과정을 듣고자 했다. 바하딘은 마르부르크(Marburg Biedenkopf Mein Landkreis)의 장애자문위원회(Behindertenbeirat)에서 활동하고 있다. 그는 우리에게 마르부르크 지역사회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주기에 최적의 인물이었다.

그는 터키의 콜루(Corlu, Turkey)에서 태어났다. 태어날 때는 장애가 없었으나 망막색소변성증(Retinitis Pigmentosa)를 앓았다. 당시 바하딘이 앓는 병은 의사들에게도 생소했다. 시력은 점점 나빠져 갔지만, 중학 교육과정을 터키에서 마치기 위해 노력했다. 그러나 한 의사가 자신의 질병이 망막색소변성증임을 진단했고, 곧 완전히 시각을 잃게 될것임을 알려주었다고 했다.

그 뒤 마르부르크에 와서 아비투어를 통과하고 컴퓨터 공학을 전공했지만, 학위를 받지 못했다. 이미 공부하면서부터 실무에 뛰어든 상태였기 때문이다.

우리가 만난 바하딘은 아주 다재다능하고, 활동적이면서, 한편으로 진지한 통찰력이 있는 인물이었다. 대학 시절부터 소프트 엔지니어이자 컴퓨터 공학자로 일을 했고, 시각장애가 있는 사람들에게 컴퓨터 과학을 가르쳐주는 회사를 운영하고 있다. 장애인을 위한 인터뷰, 포괄적인 워크숍 프레젠테이션 등을 하려는 이들을 도와 웹사이트 및 소프트웨어의 접근성을 테스팅 및 컨설팅해주는 일을 한다.

접근성 트레이너로서 전문 자격증도 보유하고 있다. 최근에 시각을 잃은 사람이 있다면 차근차근 자립을 돕고 상담(counseling) 서비스를 제공하며, 직장생활에서 겪을 수 있는 문제를 바로 잡아주는 일도 한다. 동시에 마르부르크 장애자문위원회에서 장애인을 정치적으로 대표하고, 장애인 정책 및 각종 어젠다(agenda)에 대해 논의하거나 검토하는 활동도 겸하고 있다.

우리는 바하딘으로부터 마르부르크 장애자문위원회의 역사와 조직에 대한 상세한 설명을 들을 수 있었다. 마르부르크 장애자문위원회는 마르부르크 대학교에서 출발했다. 장애 학생 대표자가 선출되어 활동하기 시작한 것이 시초였다.

그는 장애 학생들의 권리와 이익을 정치적으로 대변했고, 교수진과 장애 학생들을 잇는 가교 역할을 했다. 이는 마르부르크 지역사회 전체에서도 이와 같은 역할이 필요하다는 인식이 확산 되게 만들었다.

특히 장애자문위원회 의장은 충분한 경제적 보수를 받는 직업이다. 의장은 선거를 통해 선출되며, 다른 봉사자(아예 무보수는 아니지만 정기 회의마다 수당을 받는 것에 가깝기 때문이다)들과 함께 조직을 이루고 있다.

이미 많은 일을 하고 있는 바하딘이 큰 보수를 받을 수도 없는 자문위원회 활동에 참여하는 동기는 무엇인지 물었다.

그는 ‘더 나은 세상을 위해서’라고 답했다. 그리고 더 나은 세상, 포괄적이고 접근성이 높은 세상을 위해서는 ‘다양성(diversity)’이 필요하다고 지적했다. 다양성을 높일수록 사람들은 스스로 경험하거나 상상할 수 없는 것들에 대해 마음을 연다. 다양성은 타인의 ‘다름’을 받아들이게끔 하여 사회를 통합하는, 바로 민주주의의 본질적인 가치다.

바하딘과 다고는 다양성과 관련해 마르부르크가 가진 강점을 설명해주었다. 마르부르크에서 태어나고 자란 사람은 일상적으로 장애에 친숙해질 수밖에 없다. 자연스럽게 시간이 지날수록 타인의 ‘다름’을 인정하고 존중하게 된다. 다른 지역에서 마르부르크로 모여든 사람들도 마찬가지로 장애가 있는 사람들과 함께 사는 경험을 하게 된다. 마르부르크에서 장애인들과 일상을 공유하게 되면, 곧 ‘그들도 할 수 있으며 살아갈 권리가 있다는 걸’ 자연히 깨우치는 것이다.

그럼 다양한 사람들이 모여들지 않는 곳에서는 어떻게 다양성을 보전할 수 있을까. 해답은 접근성을 높이는 것에 있다. 배리어프리(barrier free)는 소수자에 대한 장벽을 낮춤으로써 다양성을 보전할 수 있다. 그러나 이 과정이 소수자만을 위한 것은 아니다. 배리어프리는 배제 없는 포괄적 사회를 만드는 과정이다.

다고는 ‘장애’를 인간적이고 자연스러운 것으로 해석했다. 모든 인간은 아이나 노인의 시기에 취약해지는 것을 피할 수 없다. 엘리베이터와 경사로는 아이를 태운 유모차에게 필요하고, 관절이 아픈 노인에게도 필요한 것이다. 바하딘의 말처럼, 오늘은 장애가 없어도 내일 갑자기 장애를 얻게 될 수도 있다. 그런 측면에서 배리어프리는 자기 자신에 대한 투자와 다름이 없다고 말했다.

또한 바하딘은 배리어프리가 사회 전체의 긴장을 이완함으로써 긍정적인 역할을 한다고 말했다. 마음대로 접근하기 어려운 환경은 누구에게나 긴장과 스트레스를 준다.

예를 들어 무거운 캐리어를 든 여행객에게 경사로나 엘리베이터가 없는 건물은 스트레스를 주는 환경일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간과하고 있지만, 배리어프리는 본질적으로 ‘모든 사회구성원에게’ 긍정적으로 작용한다.

한편 다고는 배리어프리가 마케팅적 측면에서 갖는 이점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예산을 분배하고 정책을 결정하는 기관에서는 경제적 이익과 비용을 따져 실용성을 평가한다. 물론 장애 인권은 비용과 이익을 따질 문제가 아니다. 그러나 그는 정치와 이데올로기가 극우주의에 가까워질수록, 장애인권은 실용성을 증명해야만 하고 다양성에 대한 논의는 물거품이 될 수 있다고 경고했다.

우리는 바하딘, 다고와의 인터뷰를 2시간으로 계획했었다. 그러나 그들이 장애와 사회, 정치를 해석하는 관점에 대해 더 듣고 싶었다. 바쁜 일정에도 흔쾌히 더 많은 시간을 할애해 주었다. 두 사람과의 인터뷰는 좀 더 넓은 시야에서 장애 인권 문제에 다각도로 접근할 수 있는 가능성을 열어 주었다.

우리는 인터뷰를 끝낸 후 다음과 같이 한국 사회에 대한 두 가지 시사점을 얻었다.

첫째는 한국 사회에서 ‘장애’를 어떻게 이해할 것인지에 대한 공적인 논의의 장이 필요하다는 점이었다. 인터뷰를 하면서 장애의 본질과 특수성을 이해하고 끊임없이 논의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느꼈다.

특히 사회 전체가 장애를 해석하고 수용하는 방식은 곧 장애인권이 사회에서 다루어지는 방식에 영향을 준다. 만약 사람들이 장애를 단순한 의료적으로, 어떤 개인의 신체적 결함 내지 타고난 역량의 결핍으로 받아들이면 사회적 장벽과 같은 외부적 환경이 ‘장애인’에게 가하는 압력을 인정하지 않게 될 것이다. 즉, 장애가 갖는 공동체적 측면의 성질을 다루지 못하게 된다. 그러나 장애는 개인적이면서 공동체적 경험이고, 보편적이지만 특수하다.

다고와 바하딘의 관점은 국제연합(UN) 및 세계보건기구(WHO) 문서에서 장애를 정의하는 내용과 같다. 장애를 보편적인 현상으로, 개인의 건강 상태와 그 개인을 둘러싼 물리적, 사회적, 태도적 환경의 특징 간 상호작용의 결과로 본다. 이러한 관점은 마르부르크 지역사회가 ‘장애인을 정치적으로 대표하고, 장벽을 낮추는 결정’을 내리게끔 영향을 주었다.

그렇다면 한국과 마르부르크가 무엇이 다르길래, 그들은 장애에 대해 함께 이야기할 수 있었던 것일까?

‘장애에 대한 풍부한 경험’은 연수 첫날의 두 인터뷰에서 공통적으로 꼽힌 마르부르크의 강점이었다. 경험은 사람들에게는 다양성을 수용하고 추동하는 유인이 되며, 기관과 조직에게는 전문성이 된다. 마르부르크 지역사회는 장애의 본질과 특수성에 대해 높은 이해도를 가지게 되었다. 이것은 우리가 연수 기간 동안 몸소 느낀 사실이기도 하다. 부끄러운 일이지만, 일행인 나보다 처음 본 마르부르크 사람들이 팀원의 휠체어를 다루는 데 훨씬 능숙했다.

경험이 있다는 것은 내 일상과 다른 시민들의 일상의 교집합을 만들어본 적이 있다는 뜻이다. 그러나 한국 사회는 장애를 주류 사회에서 분리했다. 장애를 주변화하고 경솔하게 다루었다. 대부분의 시민들이 서로의 다른 일상을 겹쳐본 경험이 없다. 이것은 서로에 대한 이해를 결여하게 하며, 서로를 낯선 이방인으로 만든다. 이것은 비용과 이익이라는 자본주의적 관점을 넘어, 바하딘이 말한 것처럼 사회 전체에게 스트레스를 주고 사회적 긴장을 높이는 일이다.

그러니 한국 사회에 무엇보다 가장 시급한 일은 함께 장애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이다. 장애를 일상 밖으로 밀어내는 일은 당장 그만두어야 한다. 일상에서 구현된 다양성은 제각기 다른 정체성을 가진 구성원들이 서로를 이해하고 사회 통합에 기여한다. 장애인의 자립과 자율성, 자기 결정권을 인정하는 것은 공동체의 테두리 밖이 아니라 안으로 들여오는 것이다. 서로의 눈과 손이 닿는 곳에서 함께 존재하는 것은 궁극적으로 인간의 상호의존성에 대한 이해를 높인다.

바야흐로 모순의 시대다. 현대의 사람들은 오만하고 자기애에 빠져 있다. 그러나 동시에 자기 비난과 자기 검열에 시달린다. 자수성가한 혹자는 성공이 오롯이 자신만의 것이라고 한다. 그러나 실제는 그렇지 않다. 우리는 눈치채지 못하는 도움과 사랑을 받고, 감사하게도 운이 따라주기도 한다. 응당 사람이라면 서로에게 의지하고 영향을 받는다. 비상도 추락도 자신의 날갯짓만으로 만들어낼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인간이란 어떤 존재인가’라는 클래식한 고민, 시민의 필요조건과 충분조건에 대한 정치적 고민이 필요한 시점이다. 고리타분해 보여도 고대 그리스 철학자들에게 마냥 맡겨 둘 문제가 아니다. 한국 사회는 장애의 본질과 특수성에 대한 공적인 논의를 확대해야 한다. 우리 모두가 상호 의존하는 인간이자 시민이라는, 근본적인 전제 위에서 말이다.

둘째는 한국 사회에서 장애인의 정치적 대표성을 높여야 한다는 깨달음이었다. 바하딘은 장애자문위원회의 조직 시스템 및 활동에 대해 두 가지를 시사했다. 한 가지는 장애인의 직접 정치 참여를 통한 자기 결정권 확보의 중요성이었다. 장애인이 권리를 위해 직접 토론하고, 권리를 위해 싸워야 한다는 것이다. 다른 한 가지는 일련의 정치적 활동이 경제적으로 보장되어야 하는 것의 중요성이었다. 장애자문위원회가 지방자치단체의 산하 위원회로써, 의장은 경제적으로 충분히 보수를 받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독일 정치는 한국 정치와 비교했을 때 대표성이 높다. 청년 시절부터 정치인 활동을 시작하는 경우가 많고, 여성 정치인의 비율도 높은 것으로 유명하다. 이는 독일의 나치 역사에 대한 성찰에서 비롯되었다. 진보적이면서도 안정적인 정치 체제를 보여주는 독일의 사례는 오랜 기간 우리나라의 선거제 개편의 모델이 되어왔다.

그러나 다당제만이 독일 정치의 진보성을 보장해주는 것은 아니다. 독일은 정치 이념 지대 자체가 우리나라와 달리 진보에 가깝게 형성되어 있다. 이러한 근원적인 문제점을 어떻게 해결할지를 제쳐두고도, ‘대표되지 않는 사람들’의 문제는 여전히 남는다. 2022년 말 기준, 국내 등록장애인은 265만명으로 집계되었다. 전체 인구의 5.2% 수준이다. 21대 국회의 장애인 국회의원은 지역구 없이 비례대표 4명, 총 300석 중에는 1.3% 수준에 그친다.

바하딘이 활동하는 지역 장애자문위원회는 각 크라이스별로 설치되어 있고 주 단위에도 설치되어 있다. 그가 활동하는 장애자문위원회는 마르부르크와 인근 지역을 아우르는 크라이스 차원의 위원회이지만, 마르부르크 중심 지역 차원에서도 별도의 장애자문위원회가 존재한다.

선거를 통해 선출되는 장애자문위원회 위원장은 충분한 경제적 보수를 받는다. 바하딘과 다고는 장애자문위원회라는 공식적인 조직이 기관 내에서 큰 역할을 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했다. 장애 인권에 관한 의제에 꾸준히 시간과 힘을 쏟을 필요가 있기 때문이다. 장애인의 정치 참여는 최후의 보루가 아니라, 비배제적 시민권을 위한 최초의 변화여야 할 것이다.

마지막으로, 나는 한국에 돌아와서부터 인터뷰 동안 바하딘과 다고가 언급한 ‘다양성’과 ‘사회통합’에 대해 고민했다. 그가 설명하려고 했던 것은 무엇이었을까? 그 이야기는 ‘물리적인 의미로 생활환경에서 장애인과 접촉을 늘리는 것’ 그 이상의 의미를 담고 있었다. 마이클 샌델은 “공정하다는 착각”에서 기회의 평등이 아니라 조건의 평등을 추구해야 한다고 주장하며, 토니의 “평등”에 나오는 구절을 인용했다.

“사회적 복지는 응집과 연대에 달려 있다. 그것은 단지 사회적으로 상승할 수 있는 기회가 아니라 높은 수준의 일반 문화, 그리고 강력한 공동 이해관계 의식의 존재를 내포한다. 개인의 행복은 각자가 자유롭게 새로운 안락과 명성의 자리를 찾을 수 있어야 한다는 것 뿐 아니라, 존엄과 문화가 있는 삶을 살아야 함도 요구한다. 후자는 반드시 출세할 것을 요하지 않는다.”

1931년에 출간된 “평등”의 구절은 지금의 한국 사회에게 필요한 깨달음을 선사한다. 사회적 이동성에 대한 광신도적 믿음은 타인을 밀어내고 독주해야 한다는 잘못된 결론으로 이어진다. ‘오만과 편견’은 우리 시대를 간단하게 표현할 수 있는 두 단어다. 그러나 자신의 역경을 ‘혼자’ 극복하는 영웅 이야기는 모조리 허구다. 우리는 독주할 수 없고 독주해서도 안된다.

바하딘은 장애인이 인간적으로 이해와 존중을 받는다는 느낌이 중요하다고 했다. 그가 말하고자 한 것은 장애인만의 문제가 아니다. 들불같이 퍼지는 극우주의의 유행, 장애인을 비롯한 사회적 약자 및 소수자에 대한 배척은 모두 같은 균열(crack)에서 발생했다. 모두가 다양한 개성을 가지고 제각기 다른 삶을 살아도, 문화적으로 사회적으로 존엄함을 인정받고 있다고 느낄 수 있어야 한다.

그리고 인간에 대한 철학적 이해가 바탕이 밑거름이 될 것이다. 당장 장애가 없는 당신도, 결국은 타인에게 의존하며 살아가야 하기에 사회적 인정을 필요로 한다는 사실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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