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853cb6f0597a59c09d1687290a9f612_1692931177_66.jpg

테너 박영필. ©박영필

마냥 즐거웠던 시절

박영필은 1979년 부산 연제구 망미동에서 3남매의 막내로 태어났다.

아버지는 택시운전을 하셨는데 생활비를 제대로 갖다 주지 않았다. 그래서 어머니가 용호시장에서 생선 장사를 하며 3남매를 키우셨는데 단칸방에 네 식구가 지냈고 누나는 다락방에서 생활했다.

아무것도 모르는 철부지 어린 시절, 활달한 개구쟁이로 학교에서는 여학생들의 고무줄도 끊는 등 동네를 휘젓고 다녔다. 공부는 하는 둥 마는 둥 유행가를 좋아했는데 당시 박남정의 <널 그리며>를 곧잘 불렀다.

중학교 때 친구가 교회에 가자고 했다.  “교회 가면 뭐하는데?”라고 물으니 기타도 치고 노래도 부른다는 말에 귀가 솔깃하여 교회에서 손끝에 피가 맺히도록 열심히 기타를 배웠다. 그 무렵 그는 015B의 <이젠 안녕>을 기타를 치면서 즐겨 불렀다.

누나는 여상을 졸업하고 조그만 회사에 경리로 일했는데 어느 날 기타를 사왔다. 부모님이나 누나에게 기타를 사 달라고 조른 적이 한 번도 없었는데 누나가 어떻게 알고 기타를 사왔는지 눈물이 날 만큼 고마웠다.

대학 갈 형편도 아니었기에 기타 치고 노래 부르면서 중학교 시절을 보내다 졸업이 다가왔다.

돈을 벌어서 어머니를 조금이라도 도와드리고 싶어서 성지공고 자동차과에 입학을 했다. 당시만 해도 자동차과가 잘나가는 유망 학과였다. 공부만 열심히 하면 취업도 바로 된다고 했다. 1996년 고3 때 취업한 선배들 얘기를 들어 보니 월급이 40만 원 정도라고 했다. 맥이 빠졌다. 40만 원 받으려고 공고에 들어왔나 싶어 더 이상 공부하고 싶은 생각이 없었다.

그 무렵 영어 선생님이 인문계만 대학을 가는 게 아니라 실업계 학생들도 대학에 갈 수 있다고 학생들을 다독여 주셨다. 그 말씀을 듣고 처음으로 공부를 하기 시작했다. 영어 단어를 외우고 국어를 공부하며 수능시험을 쳤다. 성적이 잘 나온 것은 아니었지만 2년제 대학을 갈 정도는 되었다. 컴퓨터는 중학교 때부터 통신을 했었기에 컴퓨터 관련 과를 찾다가 동명전문대학 전자계산과에 입학을 했다.

몸에 이상 증상이 나타나고

1학기를 마치고 나니 IMF가 터졌다. 등록금 마련할 길이 막막했다. 군에 갔다 오면 IMF도 끝이 나겠지 싶어 군대를 자원했다. 자동차정비기능사 2급 자격이 있어 수송부에 배치가 되었다. 11톤 유조차를 정비하는 것은 만만치가 않아 타이어 하나 바꾸는데도 끙끙거렸다. 어느날 정비장교가 그의 정비하는 모습을 보더니 “정비 잘 못하네. 니 혹시 컴퓨터 할 줄 아냐?” 고 물으시길래 “네, 컴퓨터는 자신 있습니다.” 라고 대답하니 행정병으로 보내졌다.

제대를 하고 돌아오니 전자계산과가 정보처리과로 명칭이 변경되어 있었다. 등록금을 벌어야 했기에 아르바이트 자리를 찾다가 학교에 근로장학생 제도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되어 등록금 마련에 큰 어려움은 없었다.

졸업을 하고 취업을 알아보던 중 어머니가 담석증 수술을 하셨는데 누나는 이미 결혼을 했고 형도 직장에 다니고 있어서 어머니 병간호할 사람이 없었다. 그래서 막내아들이 한 달 반 정도 병원에서 어머니를 간병했다. 집으로 돌아오니 이미 취업 시기가 지나 취업할 곳이 마땅치가 않았다. 마침 예전에 컴퓨터 통신 나우누리에 공감지대라는 78년생 띠동호회 친구가 일본 유학을 갔는데 연락이 닿았다. 평소 일본에 관심이 있었던 영필은 오사카에 있는 그 친구를 찾아갔다. 일본에서 4년제 대학에 편입을 하고 싶었다.

그러기 위해서는 어학원을 다녀야 하는데 어학원 입학 조건이 한화 2천만 원 이상의 재정보증이 필요했다. 돈을 벌어서 다시 오겠다는 다짐을 하면서 눈물을 머금고 3개월 만에 한국으로 돌아왔다.

하나로통신 협력업체에 취업을 했다. 인터넷 설치 및 AS기사였다. 2년 정도 근무를 했다.

당시 연봉이 1,300만 원이었고 2년이 지나면 인상을 해 주기로 약속을 했지만 2년이 지나도 월급을 올려 주지 않았다. 입사 동기로 고등학교 선배 하나가 있었는데 그가 회사를 떠나며 비전이 없다는 말을 했다. 그도 회사를 그만두고 친구와 같이 서울로 와서 고시원에 짐을 풀고 이력서를 쓰고 있는데 팔에 힘이 빠지는 게 느껴졌다.

팔에서 힘이 빠지고 마비가 오는 듯한 증상을 처음 느낀 것은 군 입대 후 훈련소에서였다. 한 1~2분 정도였는데 그 후 아무런 증상이 없다가 1년쯤 후에 밤에 보초를 설때 또 그런 증상이 왔다. 그때는 이상하다 싶어 군의관에게 얘기하고 CT를 찍었지만 별 이상이 없었다. 군의관은 자세한 것을 알아보려면 사제 병원에서 정밀검사를 받아야 한다고 했다. 영필 형편으로는 부담이 되었다.

그런데 통신회사에 다닐 때 혼자서 차를 몰고 인터넷 설치를 하러 가다가 갑자기 마비가 오면 운전을 할 수가 없어 길옆에 차를 세워 놓고 마비가 풀리기를 기다려야 했다. 한의원에 가서 진맥을 했더니 허약해서 그렇다며 보약을 지어 주었는데 차도는 없었다. 군대 시절에는 1 년에 한 번 정도였고, 통신회사 다닐 때는 서너 달에 한 번씩 그러더니 고시원에 한 달 정도 있었는데 그 주기가 점점 빨라졌던 것이다.

몸에 이상이 생겼다는 것을 직감적으로 알 수 있었다. 형과 함께 짐을 챙겨 부산으로 내려왔다. 근처 병원에 가니까 잘 모르겠다며 큰 병원으로 가 보라고 했다. 그래서 백병원에서 CT와 MRI 를 찍는 등 정밀 검사를 받았다.

모야모야가 뭐야?

“모야모야병 같습니다.”

‘모야모야가 뭐지?’ 생전 듣도 보도 못한 이름이었다. 의사는 한참을 설명했지만 의사 말이 연기처럼 공중으로 분해되어 버렸는지 잘 들리지가 않았다. 집으로 돌아와 인터넷으로 모야 모야를 검색해 보니 수십 개나 주르르 뜨는 게 아닌가.

‘내 병이 예사 병이 아니구나!’ 싶었다.

가슴이 마구 떨렸다. 희귀 난치성 질환 즉 고칠 수 없는 병이었던 것이다. 모야모야병은 뇌에 피를 공급하는 양쪽 내 경동맥이 서서히 막히는 질환으로, 1969년 일본인 스즈키에 의해 모야 모야병(もやもや病)으로 명명되었다.

백병원에서 왼쪽 뇌수술을 했다. 수축된 혈관을 확장하는 수술이었는데 수술 후에도 마비는 계속되었다. 그러나 마비가 오면 5~6분 정도 아무것도 안 하고 가만히 쉬면 마비가 풀린다는 노하우를 터득하게 되어 퇴원 후 마트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면서도 별 어려움은 없었다.

공부를 좀 더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어 담배를 끊고 동명대학 도서관에서 공무원시험 준비를 했다. 첫 번째 시험에서는 떨어졌다. 대체로 낙천적인 성격이라 두 번째 시험을 준비하는데 또 어머니가 쓰러지셨다. 노인들 모아 놓고 약장사 하는 곳에서 무엇을 잘못 드신 모양인데 가까운 병원에 가니 의사는 패혈증이라며 가망이 없겠다고 했다.

어머니의 죽음을 손놓고 기다릴 수는 없어 백병원으로 옮겼다. 어머니의 치료비, 그리고 그의 수술비 등으로 용호동에 어렵사리 마련했던 아파트를 팔고 백병원 근처에 전세로 이사를 했다. 어머니의 병간호는 이번에도 그의 몫이었다. 다행히도 어머니의 병세는 호전되었으나 퇴원 무렵 어찌된 일인지 어머니는 한쪽 눈을 못 보셨다. 어머니의 시력이 상실됨과 동시에 그의 눈도 흐려지기 시작했다. 다시 병원을 찾았는데 안과에는 이상이 없고 왼쪽 시신경에 마비가 오고 있으니 이번에는 오른쪽 뇌수술을 해 보자고 했다.

2007년 2월에 오른쪽 뇌수술을 했다. 팔다리의 마비증상은 좀 나아진 것 같기도 했으나 눈앞은 여전히 흐릿했다. 혼자서 다니는 데는 어려움이 없었으나 신문이나 책, 컴퓨터 화면을 읽을 수는 없었다.

백병원의 담당의사가 서울에 모야모야병 전문 박사님에게 이야기를 했더니 그를 한번 보고 싶어 한다고 하여 희망에 부풀어 찾아갔다. 의사가 수술을 하면 눈을 살릴 수가 있겠다고 하여 이번에는 전체 뇌수술을 했다. 마취가 풀리자 의사가 눈앞에 플래시를 들이대며 “빛이 보입니까?”라고 물었는데 깜깜했다. 의사는 6개월쯤 지나야 알 수 있으니 지켜보자고 하여 집으로 돌아왔다.

집 밖에 나가지도 못하고 그냥 멍하니 시간만 죽였다. 한 달, 두 달, 석 달, 6개월이 지나도 시각은 돌아오지 않았다. 그제야 부모님은 속았다며 통곡을 했다. 이제 다시는 앞을 볼 수 없다는 현실 앞에서 아무 생각이 없었다. 눈도 깜깜하고, 앞날도 깜깜할 뿐이었다.

새로운 길을 찾아

친구가 인터넷에서 시각장애인에 관한 정보를 찾아 주면서 장애인등록을 하라고 했다.

2008년 1월에 시각장애 1급으로 등록을 했다. 친구의 안내로 부산시각장애인연합회에서 점자를 배웠다. 복지관에서 점자를 가르쳐 준 선생과 나이도 비슷하여 친구처럼 가깝게 지냈 다. 어느 날 저녁을 먹고 노래방에 가게 되었다. 노래 부르기를 좋아하기 때문에 그는 사양하지 않고 <발걸음>이란 노래를 불렀다.

“우와~~영필 씨, 가수다. 가수!”

그날 영필은 그저 추켜세워 주는 칭찬이라고 생각했지만 점자 교사는 적극적으로 노래 공부를 권했다.

“서울 한빛학교에 음악전공과가 있어요. 2년 과정인데 그 정도만 배우면 영필 씨는 성악가가 될 수 있을 거예요.”

점자 교사의 권유로 한빛학교에 가서 오디 션을 보았는데 합격이 되었다. 그는 망설이지 않고 짐을 싸서 학교로 향했다. 그곳에는 시각장애 학생을 위해 기숙사가 있어서 방을 구할 필요가 없었다.

이렇게 해서 영필은 2009년에 성악 공부를 시작하였다. 합창단에서 활동하다가 중창단에 뽑혀서 노래를 목청껏 부를 수 있었다. 졸업 후에는 시각장애 음악인들로 구성된 한빛 예술단 단원으로 안정적인 음악 활동을 할 수있었다.

예술단 공연뿐만이 아니라 개인적으로 친구나 동료 결혼식 축가를 부르기도 하면서 주위 사람들이 그를 성악가로 인정해 주었다.

성악가로 무대에 서다

소프라노 김지현 교수와 함께. ©박영필
소프라노 김지현 교수와 함께. ©박영필

해외 공연을 갈 기회도 많았다. 국내 공연보다 관객들의 반응이 뜨거워 해외 공연이 잡히면 용기도 얻고 그 나라 문화도 즐길 수 있었기에 영필은 해외 공연으로 삶의 충전이 되었다.

특히 2017년 브라질 상파울루 주정부 초청으로 3개 도시 한빛예술단 순회공연을 갔을 때가 가장 기억에 남는다. 상파울루 대학교 중창단과 협연을 했는데 서로를 배려하며 멋진 하모니를 만들어 냈다. 그는 <내 마음의 아리랑>을 불렀는데 노래를 부르며 가슴이 뜨거워졌다. 아리랑이 주는 애국심이 강하게 일어난 것이다. 관객들이 모두 기립하여 치는 박수 소리가 멈추지 않았다.

한빛예술단 공연. ©박영필
한빛예술단 공연. ©박영필

이렇게 영필이 멋진 무대를 선보이기 까지 그는 많은 노력이 필요하다. 성악은 이태리곡이 많은데 이태리어를 모르기에 그것을 완벽하게 외워서 표현해야 하기 때문이다. 요즘은 유튜브에서 노래를 듣고, 사이 트에서 단어 발음을 하나하나 확인하면서 공부를 할 수 있어서 예전보다는 편해졌지만 그래도 한 곡을 소화해 낼 때까지 많은 시간이 필요하다.

처음 한빛예술단에서 활동을 할 때는 남성4중창단 등 성악을 하는 단원들이 많았는데 요즘은 한빛예술단의 유일한 솔리스트여서 영필은 책임감을 느끼며 활동을 하고 있다.

행복한 남자, 박영필

박영필은 다양한 레퍼토리를 가진 성악가이다. 그만큼 실력이 있고, 노력파라는 것을 알수 있다. 그가 아리아 <남몰래 흐르는 눈물>을 부르면 관객들은 저절로 눈을 감고 노래에 빠져든다. 그 노래는 그가 겪었던 인생사가 진하게 담겨 있어서 그의 진심이 다 표현되기 때문이다.

7년 전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가난과 질병 속에서 모진 고생을 하신 어머니는 고향인 부산에 살고 계시는데 멀쩡했던 아들이 갑자기 앞을 볼 수 없게 되었을 때 하늘이 무너져 내리는 절망의 나락으로 떨어졌었다. 그런 어머니에게 박영필은 성악가로서 성장한 모습을 보여 주었 다. 그런데 어머니를 정말 기쁘게 해 드린 일은 5년 전 결혼을 한 것이다.

2016년 어학 공부를 하는 온라인 공간에서 알게 된 일본 여성이다. 그녀는 아주 평범한 직장인이었는데 서로 호감을 느끼고 전화로 대화를 나누다가 그녀가 한국으로 와서 직접 만난 후 연인으로 발전하였고, 드디어 2년 후인 2018년 결혼을 하였다.

신부감을 데리고 부산 어머니에게 인사를 갔을 때 좋아하시던 모습을 그는 잊을 수가 없다. 

박영필은 결혼을 앞두고 일본 나가노에 있는 신부 부모님께도 인사를 드리러 갔었는데 장인, 장모 모두 흔쾌히 허락해 주셨다.

큰 어려움 없이 스몰웨딩으로 결혼식을 올린 후 서울 SH공사 임대주택에서 신혼살림을 시작한 박영필은 행복한 남자이다.

한빛예술단 단원으로 연 100회 이상의 공연을 할 수 있는 것도 박영필을 행복하게 만든다.

그는 마음껏 노래를 부르며 예술의전당 무대에 서 보고 싶은 소박한 꿈을 가진 진짜 행복한 남자이다.

 

박영필

성악가 한빛예술단 솔리스트

세종사이버대학교 사회복지학과

장애인문화예술경진대회 중창 부문 대상 장애인문화예술경진대회 성악 부문 우수상

2021~2019 한빛예술단의 MUSIC in the DARK 2017 브라질 상파울루 주정부 초청 3개 도시 한빛예술단 순회공연 2016 독일 프랑크푸르트 한인회 한빛예술단 초청 파독 간호사, 광부 50주년 기념 음악회 2014 베트남 하노이 한·아세안 정상회담 축하 한빛예술단 ‘HOPE CONCERT' 2013 필리핀 마닐라 문화원 초청 ‘한빛예술단의 Hope Concert’ 2012 중국 북경 한중수교 20주년 기념 한빛예술단 음악회 2011 미국 워싱턴 케네디센터 한인 초청 한빛예술단 음악회.

-장애인 곁을 든든하게 지켜주는 대안언론 에이블뉴스(ablenews.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