캐나다 토론토에 살고 있는 유홍선 씨는 1살 무렵 벽을 잡고 일어설 즈음 소아마비에 걸려 한 번도 두 발로 서보지 못한 채 휠체어 위에서 생활한다. 2005년 봄, 캐나다에 살고 있던 친구를 방문한 것을 계기로 현재까지 캐나다에 살고 있다.
그를 캐나다로 불렀던 캐나다 친구는 현재 그의 아내다. 통기타, 컴퓨터를 가르치는 자원봉사를 통해 연이 닿은 성인장애인공동체에서 2014년부터 책임을 맡게 되었다. 4년의 회장직 역임 이후 2018년부터는 사무장의 자리에서 실무를 이끌며 공동체의 안팎을 돌보고 있다.
황 : 캐나다에 오기로 결심한 결정적 이유는 무엇인가요?
유 : 일단 아내가 캐나다 생활에 만족하고 있던 걸 알았기 때문에 저 때문에 캐나다 생활을 접으라고 할 수 없었어요. 그리고 아까 말씀드린 것처럼 캐나다의 복지가 훨씬 좋다는 것을 알았고 무엇보다 장애인을 보는 쿨한 시선이 결정적인 이유가 된 것 같아요.
황 : 좀 더 구체적인 사례를 겪으신 게 있다면 어떤 게 있을까요?
유 : 가령 휠체어를 타는 장애 아동이 그 동네 학교에 입학을 하게 되면 '우리 학교는 시설이 안 되어 있으니 특수학교로 가는 게 좋겠다'며 보내 버리는 게 아니라 '우리 학교에 휠체어 타는 학생이 입학하게 됐으니 경사로 설치 예산을 달라'며 교육청에 요청을 해서 아이가 학교를 다닐 수 있게 만들어줘요. 기본적으로 장애인과 더불어 함께 살아가는 게 당연한 전제라는 느낌이 들죠.
황 : 작년에 한국을 다녀오셨다고 하셨는데 한국이 바뀌었다고 느끼셨나요?
유 : 돈으로 해결되는 복지 지원은 굉장히 좋아진 걸 느꼈어요. 이를 테면 장애인을 위한 교통수단이라든지, 시설에 대한 접근성이라든지 그런 것들이 요. 예전 같았으면 어딜 갈 엄두를 못 냈었어요. 그런데 그런 부분들은 많이 발전했다고 느꼈고 어떻게 보면 캐나다보다 섬세하고 편리하게 잘 만들었다는 생각도 들어요.
황 : 역시 한국 사람들이 뭐 하나 작정하고 만들 때는 섬세하고 야무지게 만드는군요. 그런데 아직도 인식이나 문화는 많이 부족하다고 느끼셨나요?
유 : 아무래도 그렇죠.
황 : 토론토 성인장애인공동체 이야기를 좀 들려주실 수 있으실까요?
유 : 혹시, 작가님은 이런 마음을 이해하실까요? 사실 저희 장애인들은 같은 장애인들을 만나는 것을 반갑게 여기지 않아요. 거울을 보는 것처럼 그들의 모습을 보면서 인식을 하게 되거든요. '아, 다른 사람들의 눈에 나도 저런 모습이겠구나' 하고요.
애써 피해왔던 거울을 맞닥뜨린 느낌이랄까요. 그리고 속된 말로 그런 말 있잖아요. 사람들은 자기보다 예쁘고 잘 생긴 사람과 다니고 싶어 한대요. 못난 사람이 못난 사람들과 다니면 '끼리끼리' 다닌다는 말 들을까 봐. 저희 장애인들도 그런 마음이 드는 거겠죠. 저도 마찬가지였어요. 그래서 처음에 공동체를 알게 되고 캠프를 간다고 하길래 사실 탐탁지 않았어요. 하지만 그곳에서 얻을 수 있는 정보가 절실히 필요했고 캐나다에 온 후 계속 아내와 붙어있다 보니 아내에게 2박 3일의 자유를 주고 싶었어요.
토론토 성인장애인공동체 창립 20주년 음악회. ⓒ토론토 성인장애인 공동체
2017년 봄소풍. ⓒ토론토 성인장애인공동체
코로나 음식바구니 배달. ⓒ토론토 성인장애인공동체
황 : 처음에 탐탁지 않았던 캠프에 가서 마음을 열게 한 계기를 만나셨나요?
유 : 결론적으로 말씀드리면 맞아요. 한국에서도 장애인 단체 모임에 대한 부정적인 마음을 변화시킨 일이 있었어요. 거기서 저보다 몸이 불편한 한 친구를 만났는데 그 친구는 심지어 담배를 피웠어요. 근데 자기 손으로 꺼낼 수도 없는 담배를 옆 사람에게 꺼내달라고 부탁을 해서 피우더라고요. 저 같으면 신세 지기 싫어서 피던 담배도 끊을 텐데. 그게 묘하게도 멋있어 보이더라고요.
장애인들은 자존감이 낮을 수밖에 없잖아요. 남에게 도움을 청하는 게 너무 어려운 사람들인데 그 친구는 자기가 원하는 것을 위해 욕을 먹더라도 당당하게 도움을 청하는 거예요. 나쁘게 볼 수도 있겠지만 저는 그 당당한 모습이 멋있다고 생각했어요. 캐나다에 캠프에서도 그런 비슷한 경험을 했어요.
한 쌍의 노부부를 만났는데 나이가 지긋하신 두 분이 항상 함께 붙어 다니셨어요. 그때가 마침 저녁이었고 석양이 지는 호숫가에 두 분이 산책을 하시는 모습을 보고 문득 너무 아름다워 보였어요. 그 실루엣을 보면서 긴 시간 동안 저분들에게 얼마나 많은 사연들이 쌓여왔을까 생각했어요.
그 모습이 가슴 뭉클해서 마음의 벽이 사라지는 걸 느꼈고 동시에 그런 생각이 들더라고요. 앞으로 장애인들은 계속 생겨날 거고 그들도 어제의 나처럼 마음의 벽과 싸워야 될 텐데 내가 오늘의 계기로 마음의 변화를 맞이한 것처럼 초보 장애인들에게도 좋은 단체가 해줄 수 있는 부분이 많겠구나, 싶었어요.
황 : 지금 사무국장으로 계신 토론토 성인장애인단체는 많은 분들이 함께 하고 계시나요?
유 : 현재 40-50명 정도 함께 하고 있어요. 저는 더 많은 사람들이 함께 했으면 하는데 여러 가지 복합적인 이유로 단체를 찾아오시기를 꺼려하는 분들이 계세요. 장애인 자녀의 외출을 삼가시키는 부모도 있고요. 본인들의 체면과 명성에 누가 갈까 봐 그러시는 것 같아요. 또 다른 분들은 경증 장애인의 경우예요. 그런 분들은 '내가 왜 장애인이야? 난 아니야'하는 생각으로 무리에 속하고 싶어 하지 않으세요. 그리고 사고나 질병으로 후천적 장애인이 되신 분들은 자신의 상황을 받아들이고 인정하는 게 힘들기 때문에 아직 마음의 문이 열리지 않은 거죠.
황 : 꼭 장애인 단체와 함께 했으면 하는 이유가 있으신가요?
유 : 꼭 우리 공동체와 활동을 해야 한다라기보다 장애인 단체를 통해서 세상에 한 발 더 다가서게 되는 계기를 만드셨으면 하는 거죠. 앞서 말씀드린 사례들은 장애인 단체만 꺼려하는 경우가 아니라 세상에 나가는 것 자체를 힘들어하세요. 그런 분들에게 이런 공동체들이 분명 도움이 되는 부분이 있거든요.
황 : 그렇겠네요. 희망과 용기를 얻을 수 있는 첫 디딤돌 같은 역할을 해 줄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어요.
유 : 망설이시는 분들께 활동하는 저희는 자신 있게 말씀드려요. 딱 한 번만 나와 보시라고, 그 한 번만 용기를 내주시면 나머지는 저희가 알아서 할 거라고. 그런데 정말 처음을 어려워하시지 대부분 만족하세요.
황 : 무엇이든 처음 한 번이 어려운 법인가 봐요. 작년에 아주 오랜만에 한국 방문을 하셨을 때 한국의 여러 장애인 단체를 찾아가셨다고 들었어요. 어떠셨나요?
유 : 짧게 다녀온 여정이라 사실 깊게 교류할 수는 없었어요. 하지만 분명히 느낀 건 한국은 참 다양한 단체들이 여러 가지 프로그램과 프로젝트들을 체계적으로 활동하고 있다는 것이었어요. 물론 인식적인 부분은 아직 한국이 캐나다보다 좋다고 못하겠어요. 하지만 장애인의 세계 안에서는 한국이 선택지가 훨씬 많고 그만큼 자유롭다고 봐요. 그래서 캐나다에서 공동체를 이끄는 입장에서 자극을 많이 받았어요. 배울 점이 많더라고요. 한국의 다각적인 활동들을 본보기로 이곳에서도 시스템화할 수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해요.
황 : 저도 한국이, 장애인뿐 아니라 다양한 소수자들의 연대가 규모와 종류면에서 캐나다의 한인 사회보다 왕성하고 의욕적으로 이뤄지고 있다고 느꼈어요. 그건 아마도 상대적으로 많은 인구수와 존재의 필요성 등 여러 가지 복합적인 원인이 작용한 결과겠지만요.
유 : 작가님은 저보다 젊은 세대니까 한 가지 여쭤보고 싶은 게 있어요. 제가 느끼기엔 한국은 장애인에 대한 사회적 인식이나 문화가 여전히 지나치게 부정적으로 느껴지는데 작가님 세대는 어떻게 느끼시나요? 올드(old)한 저희 세대가 죽고 사라져야 크게 변할 수 있을까요?
황 : 음...... 제가 어떤 한 세대를 대표해 말씀드리기엔 어려움이 있겠지만 분명한 건 좋은 쪽으로 변하고 있다고 믿어요. 물감을 탄 물 같은 거랄까요. 위에서 아래로 흘러내리는 물이 또 다른 맑은 물을 만나면서 점점 맑은 물로 되어가는 과정 같은 거라 생각해요. 물을 칼로 자를 수 없듯이 절대적인 시간이 흐른다고 갑자기 파란 물이 투명해질 수 없으니 맑을 물을 최대한 많이 그리고 빠르게 만나기를 바라는 거죠.
유 : 희석이네요.
황 : 예. 맞아요. '희석'. 확실한 것은 맑아'지고' 있다는 거예요.
유 : 그런 이유에서도 장애인과 비장애인 그리고 다른 나라의 문화들이 서로 교류하고 소통하는 게 정말 중요한 것 같아요. 다른 관점과 각자의 상황들을 알아가고 이해하는 것만으로도 큰 자극이 되고 변화를 일으킬 수 있을 테니까요.
황 : 동의해요. 사회를 관통하며 흐르고 있는 물이 만나야 할 '맑은 물'이 바로 소통과 교류가 아닐까요? 지금 하고 있는 저희의 이 대화도 한 방울의 맑은 물의 역할을 해줄 수 있다면 좋겠어요. 책 <동행>에 수록된 사무국장님의 글 마지막에 The Hollies의 <He Ain't Heavy, He's My Brother> 노래에 대한 이야기가 나와서 어떤 노래인지 찾아들었어요. 가사가 인상 깊었는데 노래 이야기 좀 해주세요.
유 : 워낙 유명한 노래다 보니 멜로디는 익숙했던 노래였어요. 라디오에서 흘러나올 때 '아, 하모니카 소리가 참 좋다' 그 정도로만 알고 있던 노래였어요. 그런데 어느 날 티브이에서 자막이 같이 나오는 걸 봤어요. 'He ain't heavy, he's my brother' 그걸 보는 순간 제 이야기와 연결되더라고요. 큰 형, 작은 형의 등이 어릴 때 저의 이동수단이었잖아요. 저를 업고 다닌 형들이 생각났어요.
형제라고 해도 무겁고 창피했을 텐데 한 번도 힘든 내색을 하지 않았어요. 그리고 공동체에서 단체 행사를 하는데 배경음악으로 쓸 곡이 필요했는데 그때도 이 노래를 떠올렸어요. 어떻게 보면 장애인 단체는 사회의 '등'을 신세 지고 있다고 할 수도 있잖아요. 하지만 저는 이렇게 생각했으면 좋겠어요. '우리'가 '너희'를 '도와준다'가 아니라 함께 살아가기 위해서 '우리'가 '우리'를 서로 '돕는다'고요. 진부할 수도 있지만 우리 모두는 사실 '예비 장애인'이니까요.
황 : 노래 가사와 더불어 사무국장님께서 하신 말씀들이 오랫동안 생각날 것 같아요. 캐나다, 한인, 그리고 장애인이라는 교집합의 중심에서 다양한 일들을 이끌어 오신 실무자로서 세상에 꼭 던지고 싶은 메시지가 있다면 마지막 질문으로 여쭤보고 싶어요. 한국, 캐나다, 혹은 장애인, 비장애인, 어디에 있는 누구든 관계없이 자유롭게요.
유 : 저는 '장애를 극복'한다는 말에 대해 많은 생각을 해요. 굳이 극복해야 하는 대상인가 싶거든요. 키가 140cm로 태어났으면 140cm로 살아가는 거고, 100m를 뛰는데 1분이 걸리면 그냥 그 속도로 살아가는 것처럼 모두가 주어진 조건 안에서 살아가는 거예요. 소위 '예비 장애인'들이 성숙한 생각과 태도를 가진다는 것은 그 사회의 격을 높이는 것이고 안정감을 제공하는 울타리로써의 사회를 만들어가는 거죠.
장애를 가지고 있는 것이, 혹은 가지게 된다는 것이 하늘이 무너지는 일이 되는 세상이 아니었으면 좋겠어요. 차 타고 가다가 사고가 날까 봐 집밖으로 나가기도 두려울 텐데 그러면 얼마나 인생이 불안정하고 고달픈가요. 지금까지 계속 말할 이야기이지만 모두에게 평안한 사회를 만들기 위해서 인식 개선이 가장 중요한 문제라고 생각해요.
장애인 입장에서도 시설 하나 더 세우고 용돈을 더 얹어 주는데 복지 예산을 쓰는 것보다 사회 인식 개선을 위한 교육에 더 열심히 써줬으면 좋겠어요. 성숙한 문화와 따뜻한 시선이야말로 장애인들의 삶의 질을 더 높여주는 것이 거든요. 그리고 비장애인 분들이 장애인들과 교류를 좀 해주셨으면 좋겠어요. 일부러 단체를 찾아가기도 하고 친구를 만들기도 하고 해 보시라고 말씀드리고 싶어요. 본인을 위해서요. 장애인 친구 한 명 두는 거 생각보다 괜찮은 일이에요. 하하.
그리고 가끔 그런 분들이 계세요. 저희를 보면서 감사한 마음이 든다고 하세요. '적어도 나는 저렇지는 않으니까 얼마나 감사할 일이야'하고 생각하는 거죠. 그 마음에는 우월감이라는 게 분명 작용하겠죠. 물론 무시하고 경멸하는 시선보다는 낫지만 그 마음에만 머물러서는 결국 그들이 불행할 수밖에 없다고 생각해요. 장애인은 비장애인을 통해서, 비장애인은 장애인을 통해서 서로의 세계를 확장시킬 수 있는 관계, 그런 친구가 되었으면 좋겠어요.
황 : 저도 새로운 친구를 사귀어서 제 세계를 확장하고 싶다는 욕심이 드네요. 그보다 제가 그 친구에게 어떤 세계를 열어줄 수 있을지 걱정이지만. 하하. 오늘 귀한 시간 내주셔서 정말 고맙습니다.
유 : 제 이야기를 들어주셔서 그리고 제 목소리에 작가님의 힘을 보태 주셔서 감사합니다. 즐거웠어요.
이화여자대학교의 130년 역사에서 첫 직선제로 뽑혔던 이혜숙 총장이 말했다. 이화여자대학교는 자기 목적을 달성하면 여자대학이 있을 필요가 없는 세상이 될 테니 결국 자기 소멸을 위해 달려가야 하는 역설적인 대학이며, 존재를 태우고 사라지는 광야로 나아가는 소명을 가졌다고.
캐나다에 있는 한인장애인 공동체도 한국의 다양한 장애인 단체도, 그리고 다른 소수자를 위한 연대들도 그들의 인권과 사회인식 개선을 위해 모이고, 손을 잡고, 함께 소리치고 있지만 결국 그들이 달려가야 하는 곳은 그들이 헤어지는 곳이다. 헤어져도 살 수 있어야 하는 세상이다.
정상과 비정상의 구분의 기준이 무의미함을 받아들이고 '우리 모두는 장애인이기도 하고 동시에 장애인이 아니기도 하다'는 말의 의미를 이해하려 노력하는 사람이 많아진다면 탁했던 물은 맑아지고 사회는 성숙해질 수 있다. Holiies의 가사 'He Ain't Heavy, He's My Brother'처럼 이 사회가 소수를 더 이상 무거운 존재로 여기지 않을 때 그리고 소수가 사회의 등을 더 이상 민망하고 불편하게 느끼지 않을 때 비로소 그들의 연대는 ‘소멸의 광야’에 가까워진다. 다수에 맞서기 위해 '같은 불편함'의 동지를 찾고 한 곳에 모이지 않아도 살만한 세상, 맞잡은 손에 힘을 좀 빼고 경직된 연대의 고리를 느슨하게 풀어도 숨통이 트이는 세상을 상상해 본다.
토론토 성인장애인공동체가 궁극의 소멸을 향해 달려가길, 그리고 그날을 앞당기기 위해 마음껏 상상하고 또 실현시키며 번영하길 기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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