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길동은 자기 아버지를 아버지라고 부르지 못해 산으로 들어갔다. 여기, 장애가 있는데 자기 장애명을 말할 수 없는 사람들이 있다. 그들은 뇌성마비 장애인이다.
뇌성마비 장애는 분명 존재하지만 정부의 어떤 문서에도 뇌성마비는 없어 보인다. 단지 뇌병변장애로 불릴 뿐이다. 장애진단을 위해 만들어진 뇌병변장애라는 명칭이 뇌성마비를 대신할 뿐이다.
그래서 어릴 적부터 장애를 가지고 살아가야 하는, 복지 선진국에서는 발달장애(developmental disability)에 속하는 뇌성마비 장애인들이 분류상 뇌병변에 속한다는 이유로 일반적으로 노인성 장애로 알려진 뇌졸중 장애인처럼 분류되고 있다. 그래서, 뇌성마비 장애인들은 정확한 통계가 없어 인구 수도 모르고 현황도 모르는 사람들이 되었다.
뇌성마비 장애는 뇌병변 기질의 이상으로 생기는 장애이므로 대부분 중복장애를 가지고 있고 어릴 때부터 특유의 경직을 갖고 살아야 하기에 성인이 되면 근골격질환으로 고통 속에 살아야 한다. 경직으로 직업을 갖기도 힘들고 결정적으로 말장애(언어장애)를 갖게 되기에 지능이 떨어지는 사람으로 취급을 받고 있기도 하다.
뇌성마비에 대한 인식개선이 절실히 필요하다. 그러나 장애 인식이라는 것이 캠페인으로 개선되는 것이 아니다. 뇌성마비 장애인이 능력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사회에 보여주어야 한다. 그렇기 위해서는 사회적으로 능력을 발휘할 수 있는 기회를 주어야 한다. 그러나 지금까지 그러한 기회는 최소한 우리나라에서는 거의 없었다.
보건복지부는 장애인권익지원과장을 개방직으로 하여 공모를 통해 장애인 당사자를 임명해 왔다. 여섯 차례에 의한 장애인 당사자의 임명으로 인한 효과를 보면, 가장 먼저 장애인 당사자도 훌륭하게 일할 수 있는 능력을 발휘하여 왔다는 사실이다. 오히려 당사자였기에 더 대단한 일들을 할 수 있었다고 본다.
장애인 당사자가 장애인복지 분야 실무를 맡아 일한 가장 큰 효과는 감수성이다. 복지 전문가나 행정가의 입장이 아닌 장애인 당사자의 입장에서 욕구와 현실을 균형 있게 이해하고 반영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 장애인으로 살아본 경험과 입장은 너무나 값진 것으로서 당사자가 아니면 절대로 이해할 수 없는 것이다.
다음으로 당사자가 실무 책임자로 일함으로써 장애인의 공무원 임용권을 행사할 수 있었고, 정책 참여의 기회를 얻을 수 있었다. 장애인이 동정과 시혜의 대상이 아니라 정책의 주체자로서 직접 참여하여 자신의 문제를 해결하는 사회를 만들어낸 것이다.
그리고 장애인 당사자가 복지행정을 맡음으로써 행정기관과 장애인과의 가교적 역할이 비교적 순조롭게 되었다. 장애인 당사자가 말하는 것이 장애인들에게는 설득력이 있고, 입법부나 행정부에서도 설득력이 있었으며, 그 가교적 역할을 하는 일종의 장애인 대표로서의 주체적 참여가 가능하게 된 것이다.
이로써 장애인 당사자들은 역량강화의 기회가 되었다. 단순히 교육이나 훈련을 통해서 역량강화가 되는 것이 아니라 실질적인 행정을 해 봄으로써 사회적 인식도 달라지고, 장애인의 복지행정 참여에서의 방법과 필요성, 문제를 볼 수 있고 해결할 수 있는 능력이 증대된 것이다.
장애인들은 누구나 같은 장애인의 입장을 이해하는 데에 비장애인에 비해 강점을 가지고 있다. 하지만 장애 유형이 15가지나 되고 같은 장애인이라고 하더라도 그 정도와 현상, 반응, 사회적 환경은 천차만별이라 모든 것을 이해하기에는 한계가 있다. 정부가 진정 장애인들과 가교 역할을 하려고 한다면, 보다 다양한 노력을 기울여야 하고, 그 노력 중 하나는 더욱 장애 정도가 심하고 소외된 장애유형에게 개방직에서 일할 기회를 제공하는 것이 되어야 한다.
그리고 당사자의 입장을 반영한 행정 역시 중증이 아니면 중증 장애인의 욕구를 충분히 이해하기 어렵다. 중증 장애인이 그 직무를 수행한다면 장애인의 당사자에 의한 행정참여는 더욱 발전된 모습일 것이고, 사회적 인식에도 크게 기여할 것이며, 가장 복지가 필요한 중증의 행정에 대한 만족도도 높아질 것이다.
장애의 다양성을 고려하여 어떤 장애유형이든 가능하겠으나, 장애인복지법상 정한 장애 유형의 두번째 유형인 뇌병변 장애인에 속하는 뇌성마비가 차례가 되었으면 한다.
그 이유는 뇌성마비 장애인 중 복지 전문가로 현장에서 풍부한 경험을 가진 인사들이 많이 존재하고, 장애인자립생활센터나 장애인 당사자단체에서 새로운 복지 패러다임의 변화를 위해 노력해 온 인사들도 많으며, 학문적으로는 최고 학부인 대학원을 졸업하고 계속 연구에 종사하고 있는 인물들도 많다. 즉 충분한 인력을 가지고 있다.
둘째로는 신체적 장애인 중 사지 운동의 제한으로 인한 것과 뇌병변 기질 문제로 인한 운동성의 제한은 서로 매우 다른 원인으로 인하여 재활 해결 방안 역시 다르다. 그동안 장애인권익지원과장으로 임명되었던 분들도 노력을 많이 기울였겠으나 아무래도 경직이나 떨림에 대하여 당사자가 아닌 이상 이해하기 어렵다.
이로 인해 겪는 다양한 부수적 현상으로 유발되는 사회적 제한을 알기도 어렵다. 장애 유형별 욕구를 정책에 반영하기 위해서는 장애 유형의 다양성을 고려하여 과장직에 임용될 필요성이 있으며, 이제 뇌성마비 장애인에게 그 기회가 와야 할 분위기가 무르익지 않았나 싶다.
우리는 차별을 “거부하거나” “배제하거나” 하는 것들만이라고 여기는 경향이 있다. 하지만 “결과적 차별”이라는 것도 있다. 뇌성마비 장애유형이 단 한 번도 과장직에 임용된 바가 없는 것은 우연의 일치는 아닐 것이다. 그것은 결과적 차별인 것이다. 결과를 놓고 일어나는 격차가 결과적 차별이다.
시각이나 지체장애인 등이 국회의원으로 진출하는 경우가 있고, 다른 장애 유형들 역시 변호사나 다양한 현장에서 일하고 있다. 좋은 일이고 우리 사회의 인식 변화나 제도 개선에 큰 힘이 되고 있다. 뇌성마비 장애인들도 그 이상의 기여를 하고 싶다. 하지만 뇌성마비 장애인들은 충분한 능력을 가지고 있음에도 불합리한 선입견으로 인하여 사회활동과 참여에 제한을 당하고 있다.
행정부가 이러한 사회적 인식을 바로잡고 뇌성마비 장애인도 충분히 잘 할 수 있다는 것을 증명해 보일 기회를 제공한다면, 그것이 욕구를 충족시키는 복지의 실현일 것이고, 사회적 인식의 변화일 것이며, 진정한 당사자에 의한 행정의 주체자로서 인정하는 새로운 패러다임의 실천의 장이 될 것이다.
정부의 과장직 하나로 세상이 바뀌지 않겠지만, 행정부나 입법부에서도 뇌성마비가 충분히 능력을 발휘할 수 있다는 것을 세상은 알아야 한다.
※이 글은 한국뇌성마비복지회 윤두선 부회장께서 보내 온 글입니다. 에이블뉴스는 언제나 애독자 여러분들의 기고를 환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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