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이블뉴스 이정주 칼럼니스트】 유럽의 지붕, 알프스를 품은 스위스. 누구나 한 번쯤은 그 고요하고 정돈된 자연을 꿈꾸지만, 정작 그곳 사람들의 삶은 척박한 산악 환경과의 싸움이었다. 스위스인의 질긴 생존력은 산을 깎고, 공동체를 만들고, 정밀기계를 조립하며 만들어졌다. 이들이 오랜 시간 지켜온 한가지는 ‘가족’이었다.

그래서일까. 스위스의 복지는 국가가 아닌 가족이 중심이다. 장애인복지도 예외가 아니다. 장애인 자녀를 둔 부모가 돌봄을 요청하면, 정부는 맞춤형 서비스를 설계한다. 양육비는 기본이고, 부모가 맞벌이하면 학교와 보육시설의 운영시간을 조정해준다. 돌봄을 위한 서비스가 아니라, ‘일상을 살아낼 수 있도록’ 도와주는 지원이다.

그런데 최근 스위스는 이 가족 중심 돌봄을 넘어 장애인의 자립과 사회참여에 집중하고 있다. 그 핵심은 ‘생활지원사 제도’다. 이름만 들으면 한국의 ‘활동지원사’를 떠올릴 수 있지만, 스위스의 방식은 조금 다르다.

내가 고용주가 되는 삶

스위스에서는 장애인 본인이 직접 생활지원사를 고용할 수 있다. 필요한 시간만큼, 필요한 일을, 필요한 사람에게 맡긴다. 하루 2시간만 도와줄 사람을 ‘5% 근무조건’으로, 하루 4시간 도와줄 사람은 ‘10% 조건’으로 고용할 수 있다. 마치 시간제 가사노동을 구하듯, 스위스 구인구직 사이트에는 장애인이 올린 생활지원사 모집 공고가 꽤 많다.

예컨대 휠체어를 탄 대학생이 아침 외출 준비와 귀가 후 일상을 도와줄 사람을 찾는 식이다. 코로나로 비대면 수업이 진행되면 풀타임 보조가 필요하고, 대면 수업이 시작되면 아침 2시간, 저녁 2시간만 필요하다는 식의 구체적인 조건도 제시한다.

스위스 법정 근로시간인 하루 8시간 20분, 주 5일이다. 이를 100%라고 부른다. 아침 2시간만 도와주는 생활보조인은 5%, 아침 2시간과 저녁 2시간을 모 도와줄 수 있다면 하루 4시간은 10% 근무 환경이다. 고용주와 피고용인의 사정과 필요에 따라 5% 근무조건으로 두 명을 고용할 수도 있고, 10% 근무조건으로 한 명을 고용할 수도 있다. 이렇게 퍼센트로 근무 시간과 일수를 계산하고 파트타임 종사자의 비율이 높은 스위스 노동 시장의 특징이다.

생활지원사의 시급은 최소 33.5프랑(한화 약 4만 2천 원). 자격이 필요한 경우엔 시급이 6만 원이 넘는다. 야간이나 1박 근무는 최대 11만 원까지 지급된다. 이 모든 재원은 스위스의 장애·상해 연금에서 보조로 나온다.

여기서 중요한 점은 장애인이 단순한 ‘수급자’가 아니라는 것이다. 고용주로서 직접 생활지원사를 면접 보고, 계약하고, 관리한다. 이 구조는 단순한 돌봄이 아니라 ‘삶을 살아갈 힘’을 제공한다.

주거공동체, 혼자 살아보기 훈련

또 하나 특별한 점은 ‘주거공동체’다. 장애인이 다른 이들과 함께 살며 독립생활을 연습하는 구조다. 친구든 낯선 이든, 여러 명이 하나의 아파트를 나눠 쓰며 자신만의 방을 갖고, 부엌·화장실은 공유한다.

장애인 복지기관인 ‘프로 인피르미스’에서는 이 주거공동체에서 몇 달간 지내며, 독립생활 교육을 받는 ‘주거학교’ 프로그램도 운영한다. 이후엔 혼자 살아볼 수 있는 소형 아파트에서 테스트 생활을 한 뒤, 복지사와 함께 진짜 내 집을 찾고 계약까지 진행한다. 이름하여 ‘자립생활의 리허설’인 셈이다.

스위스는 여전히 가족 중심 복지를 지향하지만, 그 안에서 장애인을 돌봄의 객체가 아니라 삶의 주체로 대우하려는 변화를 시도하고 있다. 단순히 돈을 주는 복지가 아니라, 살아갈 수 있는 구조를 만들어주는 복지다.

한국도 ‘활동지원사’와 ‘근로지원인’ 제도가 각각 존재하지만, 두 제도는 전혀 다른 법체계 안에 있어 연결되지 않는다. 지원받는 시간도, 역할도 나뉘어 있다. 일상과 노동을 하나의 흐름으로 보지 않고, 제도로 나눈 것이다. 하지만 삶은 그렇지 않다. 아침에 일어나 씻고 밥 먹고, 출근하는 것까지가 삶이고 노동의 연속이다.

스위스의 방식이 이상적이라고 단정지을 수는 없지만, 우리가 놓치고 있는 본질을 다시 생각하게 만든다. 장애인에게 필요한 것은 시혜가 아니라 제도이고, 가족에게 필요한 것은 희생이 아니라 평등한 분담이라는 것.

사람은 누구나 공부할 때 공부하고, 일할 때 일하고, 사랑하고, 결혼하고, 양육하는 삶이 이어질 수 있어야 한다. 장애인도 그렇게 살아갈 수 있도록 국가 사회가 구조로 제도로 돌보아야 한다. 우리가 나아가야 할 방향이다.

*이 글은 스위스사 황효빈 님의 글을 참고 인용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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