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구나 자기 삶의 서사가 있기 마련이지만 문정연과 이병륜의 삶은 파도처럼 휘몰아치는 여정 끝에 예술처럼 작지만 아름다운 행복이 펼쳐지고 있다.
문정연은 성균관대학교 사범대학 교육학과에 입학하여 교사의 꿈을 꾸고 있었고, 이병륜은 국민대학교 기계설계학과에 다니며 엔지니어로 대기업 취업을 목표로 하고 있었다.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만난 두 사람은 4년 동안 연애 끝에 결혼을 했다. 그리고 딸과 아들 남매를 두고 홀로 되신 시아버지를 모시고 살았다. 남편은 계획대로 대기업에 입사하여 안정적인 생활을 하였지만 퇴사 후 약 10년 동안 공조사업을 운영하다가 경영 위기로 인해 폐업하게 되었고, 집마저 경매로 넘어가는 등의 어려움을 겪었다.
아이들은 커 가고 시아버지는 치매로 돌봄이 필요했다. 그 당시 월세를 살 정도로 가정 형편이 바닥을 치고 있었기에 가족을 책임져야 하는 남편은 점점 더 초조해졌다. 회복해 보려고 중국에서 사업을 기획하던 중 한국에 잠시 왔다가 2010년 가로수를 들이받는 교통사고를 당했다.
장애와 암이라는 불청객
문정연은 남편을 간호하는 삶을 살아야 했다. 남편은 교통사고로 경추 즉, 목뼈가 부러져서 전신마비 상태였는데 경추 속 신경인 경수 6, 7번 손상으로 팔의 기능은 많이 회복되었다.
2년 동안 병원 생활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간다는 작은 기쁨을 갖고 있을 때 문정연 몸에 이상이 생겼다. 왼쪽 다리가 아파서 걷기가 힘들었다. 남편을 침대에서 일으키고 휠체어에 태우는 일들을 반복하면서 다리에 힘을 주었기 때문에 생긴 일시적인 증상이라고 생각했다.
한의원에 가서 뜸을 뜨고 침도 맞았지만 증상은 점점 심해졌다. 병원에 가니 좌골 신경통이라고 하여 약을 처방해 주어 열심히 복용했지만 잠시 통증이 사라질 뿐이었다. 병원을 전전하다가 받은 병명은 골육종암이었다. ‘남편을 돌봐야 하는데 왜 나에게까지 이런 문제가 생겼을 까!’라는 원망을 쏟아냈지만 현실은 냉정했다. 바로 암과 싸워야 했다. 암 부위가 골반이 라서 인공관절로 대체할 수가 없기에 수술 후 목발을 사용하게 되었다.
그때부터 부부에게 닥친 문제는 장애였다. 부정한다고 사라질 일이 아니기 때문에 부부는 ‘지금 상황에서 최선을 다하자!’ 마음먹고 정신을 바짝 차렸다. 다행히 아이들은 스스로 잘 성장하고 있었다. 사고 당시 딸은 대학생이고 아들은 중2였는데 기숙사에서 지내며 어려움을 잘 견뎌 냈다. 아이들이 있는 부부에게 방황은 사치였다.
1988년 장애인올림픽 선수촌으로 사용했던 문정동 아파트에는 장애인용 화장실이 있다는 것을 알고 그곳으로 집을 구해 들어갔다.
남편이 먼저 마음을 추스렸다. 같이 성당에 다니며 기도하면서 장애를 받아들였다. 시간이 광속으로 지나가고 있음을 자각하니 마음이 더 바빠졌다. ‘이제 내가 해야 할 것은 무엇일까?’ 라고 고민할 때는 막막했지만 ‘무엇이 되든지 열심히 시도하자!’라는 긍정적인 시각으로 주위를 살펴보니 할 일이 많았다.
부부이자 동료로서

서양화가 문정연 & 한국화가 이병륜. ⓒ문정연
함께 미술을 시작했다. 문정연은 원래 미술에 관심이 없었는데 남편이 취미로 사진작가 일을 해 왔던 터라 자연스럽게 그림도 취미로 그리게 되었다. 옆에서 같이 있다 보니 부인도 그림을 그리게 되었는데 하다 보니까 문정연은 서양화가 좀 더 잘 맞고, 이병륜은 서예와 한국화 쪽이 더 잘 맞는단 걸 알게 됐다.
처음에 연필 스케치부터 배웠다. 장애인복지관에서 배우고, 장애인미술협회 같은 곳에서 파견된 강사를 통해서도 배우고 기회가 닿으면 모두 참여했다. 유화를 처음 하려면 재료값만 100만 원 이상 든다고 하는데, 장애인미술교육사업 덕분에 부담 없이 시작할 수 있었다. 2년 정도 배우고 나서 본격적으로 그림 그리기에 돌입했다.
문정연은 서초구립한우리정보문화센터 입주 작가로 선정 되어 주 3일 이상은 그곳에서 작업을 했다. 공간이 넓고 편해 그림에 집중할 수 있었다. 그래서 장애미술인을 위한 레지던스 사업이 필요하다고 강조한다.
“장애예술인으로서 나의 이야기를 그림으로 표현해 보려고 나만의 주제가 뭘까 생각하고 있어요. 어떻게 하면 나만의 메시지를 전할 수 있을지 고민하죠. 예를 들어 재활운동으로 수영을 하면서 느끼는 자유로움을 ‘파도’, ‘흐름’이라는 주제로 발전시켰어요.”
문정연 작가는 모든 생명의 어머니이자 둥지인 ‘바다’를 화폭에 펼쳤다. 물을 여러 가지 기법 으로 표현하고 때로는 나비를 꿈의 매개체로 차용했다. 물은 곧 ‘흐름’이다. 마음먹은 대로만 흘러가지 않는 삶을 겪었지만, 그 안에서 성장하고 성숙하는 과정은 물 흐르듯 순리에 따라 흐른다는 것을 경험했기 때문이다.
“개인적으로는 좋은 일, 나쁜 일 모두 이 파도에 담았다고 생각하고, 그걸 넘어서서 나의 꿈과 희망을 찾아보자는 이야기를 하고 싶었어요. 물방울을 의인화해서요. 2022년에 여행 갔던 곳에서 윤슬(달빛이나 햇빛에 비치어 반짝이는 잔물결)을 봤어요. 몽돌에 부딪히는 파도와 윤슬을 한참 바라보며 멍하니 있다 보니, 마음이 평온해져서 작업의 오브제로 사용했어요.”
전시회에 왔던 친구들이 ‘너 어디에 그런 재주가 있었냐?’고 놀라워한다. 50세 넘어서 시작한 거니까 그런 말을 할 만도 하다. 처음에는 작가가 될 거라고 생각을 못했다. 힘든 시간이 있었고, 그 시기를 이겨 내기 위한, 시간을 잘 보낼 수 있는 방편 정도로 생각했었는데, 그림이 자기 삶의 이유가 되었다.
이병륜은 유화와 한국화, 서예, 사진을 두루 작업 중이다. 그가 학창 시절부터 해 오던 서예는 사람을 항상 겸손하게 만드는 작업이다. 서예와 한국화는 집중력과 인내심을 요구하며 마음을 차분하게 만들어 주는 명상 효과가 있다.
이병륜은 ‘변화무쌍한 자연은 나에게 깊은 영감을 준다. 이러한 호기심이 있다는 사실은 내가 살아 있음을 더욱 느끼게 해 준다. 자연의 다채로운 변화와 생활 속에서 순간적으로 보여 지는 것들이 정말 흥미롭다.’고 하였다.
작가로 성장하기 위해

서양화가 문정연 & 한국화가 이병륜. ⓒ문정연
“보통 장애인복지관에서 실시하는 미술교육들은 단발성으로 끝나곤 하거든요. 그런데 제가 지금 동아리 활동으로 참여하고 있는 강남장애인복지관에서는 지속적으로 활동할 수 있는 환경이 마련돼 있어요, 신진 멘토 프로그램을 통해 2년 동안 일대일 멘토링을 진행했거든요. 이렇게 지속적으로 지원되는 장애예술인 프로그램이 계속되었으면 좋겠어요.”
문정연은 자신의 경험을 통해 터득한 장애인예술의 방향을 잘 집어내었다. 요즘 디지털 회화작업을 배우니까 작업에 도움이 많이 된다면서 이런 제안을 하였다.
“미디어아트 교육도 받았 고, 매개자 과정 교육도 받았었죠. 이런 교육프로그램 들이 열리는 장소에 오기 힘든 중증장애인들도 교육을 받을 수 있게 파견 형태로 프로그램이 열린다면 좋겠단 생각이 들어요.”
문정연은 2023년 서울디지털대학교 회화과를 졸업하였다. 미술에 대한 이론이 부족하다는 생각에 뒤늦게 미술을 전공하였다. 이병륜은 서울평생학습포털 에버러닝으로 한국화와 사군자 프로그램에 참여하며 공부를 하고 있다. 화가로서 발전하려면 끝없이 배워야 한다고 생각 하기 때문이다.
문정연은 지난해에 한국장애인문화예술원에서 실시하는 장애인예술 창작지원사업에 선정 되어 온라인전시와 작가 포트폴리오 역할을 하는 개인홈페이지(www.jeongyeonmoon.com)를 제작하였고, 인사동 가온갤러리에서 개인전을 한다.
한국예술인재단에서 실시하는 창작준비금사업에 응모하여 선정이 되면 편안히 작품 준비를 하지만 선정이 안 되면 창작하는 데 어려움이 있다. 그래서 장애예술인창작준비금제도 설문조사에 응하며 조속히 시행되기를 바랬다. 그래도 예전보다는 장애예술인들이 문을 두드릴 곳이 많아졌다.
이병륜은 학창 시절부터 미술을 좋아했기 때문에 장애인복지관이나 성당에서 미술동호회 활동을 하고 있다. 장애가 심해서 서예를 할 때 큰 작품을 하지 못하고, 사진 출사시 시선이 1m를 넘지 못하지만 할 수 있는 만큼만 하자는 것이 그의 철학이다.
화가로서의 어려움, 그래도 가야 할 길

한국화가 이병륜 & 서양화가 문정연 ⓒ문정연
‘내가 왜 그림을 그리고 있을까?’
‘괜히 쓰레기를 양산하는 것 아닐까?’
아트페어나 전시를 통해 종종 작품이 팔리기도 하지만 부부가 같이 미술 작업을 하다 보니 작품이 많이 쌓이는 것도 문제이다. 그래서 공용으로 사용할 수 있는 수장고가 반드시 필요하 다고 장애인미술품 수장고 사업을 제안했다.
문정연은 ‘내가 즐겁지 않으면 하지 말자.’는 것이 자신의 창작 철학이라고 한다. 즐겁게 작업을 해야 다른 사람과 공감할 수 있기 때문이다.
‘저는 미술을 배우면서 삶을 아름다운 시선으로 바라보게 됐어요. 다른 분들도 그런 경험을꼭 했으면 좋겠어요.’라며 창작이 자신에게 얼마나 큰 역할을 하는지 말해 주었다.
또한 이병륜은 ‘한 획 한 획에 집중하면서 몸의 균형을 유지하기 때문에 건강에도 도움을 준다. 한국의 전통문화와 예술을 이해하고 계승한다는 자부심을 갖고, 자아 표현과 성취감을 느끼고 있다.’고 하였다.
이병륜은 언제나 부족함을 많이 느끼며 다시 정진하고 있는 수도자 같은 작가이다.
세월이 약이라고 했던가. 가족들을 뿔뿔이 흩어지게 했던 교통사고 당시 이병륜은 55세, 문정연은 50세였다. 순조롭게 살았다면 가장 안정적인 시기에 그들은 처음부터 다시 시작해야 했다.
다행히 아이들은 잘 자라 주었다. 간호공무원이 된 큰 딸은 결혼하여 첫 손녀를 보았다. 아들은 환경공학과 졸업 후 중견 회사에 취업하여 독립하였다. 이제는 아이들이 부모 걱정을 한다.
문정연, 이병륜은 그 어느 때보다 편안하다. 여전히 그림이 경제생활에 크게 도움이 되지는 않지만 그래도 일상적으로 그림을 그리고, 지인들을 만나 작품 얘기를 나누고, 전시회 계획을 세우면서 부부는 미소 짓는다.
남편 칠순에 인사동 전문 갤러리에서 부부전을 하려고 계획하고 있는 문정연, 이병륜 부부는 화가이기에 진정으로 행복하고 소박하지만 빛이 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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