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이블뉴스 김경식 칼럼니스트】 대한민국에서 장애인으로 살아간다는 것은 험난한 세상과 싸우는 일인 동시에 거대한 ‘행정의 미로’를 헤매는 일이다. 아침에 눈을 떠서 잠들 때까지, 나의 하루는 수많은 부처의 경계선을 넘나드는 줄타기의 연속이다.
집 밖을 나서기 위해 활동지원사를 부르는 일은 보건복지부의 소관이다. 휠체어를 타고 저상버스를 기다리거나 장애인 콜택시를 부르는 일은 국토교통부와 지자체의 영역이다.
학교에 가서 교육을 받는 것은 교육부의 일이고, 졸업 후 직업 훈련을 받으려면 고용노동부의 문을 두드려야 한다.
문제는 이 모든 과정이 매끄럽게 연결된 파이프라인이 아니라, 뚝뚝 끊어진 징검다리 같다는 점이다. 징검다리 사이의 간격이 너무 넓어 물에 빠지는 일은 오롯이 당사자인 나의 몫이다.
우리는 이것을 정책의 ‘파편성(Fragmentation)’과 ‘분절성(Disconnection)’이라 부른다. 그리고 이것이 바로, 지금 우리에게 ‘강력한 장애인 전담부서(컨트롤 타워)’가 절실히 필요한 이유다.
‘칸막이 행정’이 만든 절벽
정부는 매년 장애인 복지 예산이 늘었다고 홍보한다. 하지만 현장의 당사자들이 체감하는 현실은 그 숫자만큼 따뜻하지 않다. 그 이유는 예산이 부족해서라기보다, 그 예산과 정책이 부처별 ‘칸막이(Silo)’ 안에 갇혀 효율적으로 흐르지 못하기 때문이다.
가장 대표적인 비극은 ‘교육과 고용, 그리고 복지의 단절’에서 일어난다. 장애 학생이 고등학교를 졸업하는 순간, 교육부의 울타리는 사라진다. 이제 사회로 나가야 하는데, 고용노동부의 직업 훈련 정보는 자동으로 연동되지 않는다.
복지부의 낮 활동 지원 서비스는 대기가 길다. 학교라는 소속이 사라진 발달장애인은 갈 곳을 잃고 집안에 고립된다. 부모들은 이 시기를 ‘죽음의 계곡’이라 부른다. 생애주기가 전환되는 이 결정적인 시기에, 부처 간 데이터를 연계하고 서비스를 미리 설계해 주는 컨트롤 타워가 없기 때문에 벌어지는 일이다.
취업의 현장에서도 엇박자는 계속된다. 중증장애인이 일을 하려면 근로지원인(고용부)뿐만 아니라, 출퇴근을 위한 이동 지원이나 신변 처리를 위한 활동지원(복지부)이 동시에 필요하다.
하지만 고용부는 “복지 서비스는 복지부에 가서 알아보라”고 하고, 복지부는 “취업을 해서 소득이 생기면 복지 급여나 서비스 시간이 줄어들 수 있다”고 경고한다. 일하고 싶어 하는 장애인에게 국가는 사다리를 놓아주는 것이 아니라, 서로 다른 부처의 규정을 들이밀며 딜레마에 빠뜨린다.
이것이 ‘공급자 중심’ 행정의 민낯이다. 그들은 자신들의 관할 구역 안에서만 일을 처리한다. 내 삶은 하나로 이어져 있는데, 행정은 내 삶을 보건, 고용, 교육, 교통이라는 조각으로 난도질해 놓고 각자 퍼즐 맞추기를 강요하고 있다.
선진국은 ‘복지’를 넘어 ‘조정’으로 간다
눈을 돌려 해외 선진국들을 보자. 그들 역시 과거에는 우리와 비슷한 고민을 했다. 하지만 그들은 ‘시혜와 복지’에서 ‘권리와 통합’으로 패러다임을 전환하며 행정 조직을 뜯어고쳤다.
미국을 보자. 미국은 1978년부터 대통령 직속 독립기구인 ‘국가장애인위원회(NCD)’를 운영하고 있다. 이들은 특정 부처의 하부 조직이 아니다. 대통령과 의회에 직접 권고안을 내고, 미국의 모든 연방 기관이 장애인 정책을 제대로 이행하는지 감시한다. 2012년에는 흩어져 있던 조직을 통합해 ‘지역사회거주국(ACL)’을 만들었다. 노인이든 장애인이든 ‘지역사회에서 자립하여 사는 것’이 목표라면, 칸막이를 없애고 통합 서비스를 제공하겠다는 의지다.
영국은 어떠한가. 그들은 장애인 담당 부서를 노동연금부 산하에서 총리실 직속의 ‘내각부(Cabinet Office)’ 산하 ‘Disability Unit’으로 격상시켰다. 장애인 문제는 복지부 혼자 해결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교통부 장관에게 장애인 이동권을, 주택부 장관에게 무장애 건축을 강제하려면 범정부 차원의 강력한 조정 권한이 필수적임을 간파한 것이다.
프랑스는 ‘MDPH(장애인증)’라는 원스톱 센터를 통해 당사자가 관공서 쇼핑을 하지 않도록 만들었다. 한 곳에 신청하면 판정부터 수당, 취업 연계까지 통합적으로 처리된다.
이들 국가의 공통점은 명확하다. 장애인 정책을 ‘복지부의 일’로만 가두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들은 장애 문제를 전 부처가 함께 풀어야 할 ‘범정부적 과제’로 격상시켰고, 이를 진두지휘할 강력한 권한을 가진 조직을 만들었다.
한국의 현실 "권한 없는 위원회, 힘없는 주무 부처"
반면 한국의 현실은 초라하다. 우리에게도 국무총리 산하 ‘장애인정책조정위원회’가 있다. 하지만 1년에 한두 번 회의가 열릴까 말까 한 비상설 기구에 불과하다. 실질적인 예산권도, 부처 간 이견을 강제로 조정할 권한도 없다. 그저 각 부처가 써온 계획서를 취합하여 발표하는 ‘보고회’ 수준에 머무르기 일쑤다.
주무 부처인 보건복지부 장애인정책국 역시 한계가 명확하다. 복지부는 기획재정부 앞에서 예산을 따내기 위해 읍소해야 하고, 국토부나 교육부 같은 타 부처에 “장애인 정책을 이렇게 하라”고 지시할 위상이 없다. 결국 ‘장애 감수성’이 없는 타 부처 공무원들에 의해 장애인 이동권 예산이 삭감되거나, 장애인 교육 정책이 후순위로 밀리는 일이 반복된다.
지금의 구조로는 아무리 좋은 정책 비전을 세워도 현장에서 작동하지 않는다. 머리(위원회)는 생각만 하고, 팔다리(각 부처)는 따로 놀며, 몸통(전담 집행 기구)은 부실하기 때문이다.
‘장애인청’ 혹은 강력한 ‘대통령 직속 기구’가 필요하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