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3월 4일 주디스 엘런 휴먼(Judith Ellen Heumann)이 영면에 들었다. 향년 75세다.
휴먼은 1947년 12월 18일 필라델피아에서 태어나 뉴욕시 브루클린에서 자랐다. 아버지 베르너 휴먼과 어머니 일사 휴먼은 나치 독일의 핍박을 피해 미국으로 건너간 유대인이었다. 아버지는 정육점을 운영했고, 어머니는 시민단체에서 활동했다.
휴먼은 2살 때 폴리오 바이러스에 감염된 후 3개월 동안 인공호흡 장치(iron lung) 안에서 치료를 받았다. 그 후로는 줄곧 휠체어를 타고 생활했다. 1950~60년대 학창시절, 그는 다른 장애인들처럼 무수한 차별을 겪었다.
화재 시 스스로 대피할 수 없다는 이유로 유치원과 초등학교 입학을 거부당했다. 언어치료학을 전공하고 교사가 되려 했지만, 이번에는 화재 시 학생들을 대피시킬 수 없다며 임용 시험 기회조차 거절당했다. 그는 굴복하지 않고 뉴욕시 교육위원회를 상대로 소송을 제기했다. 당시 지역신문 데일리뉴스는 “미국에서 소아마비인은 대통령이 될 수 있어도 교사가 될 수는 없다”는 헤드라인을 달았다. 루스벨트 대통령과 휴먼을 비교하여 부당함을 꼬집은 것이다.
패소가 예상되자 뉴욕시는 소송을 중도에 포기하고 휴먼에게 시험 자격을 부여했다. 임용 시험에 합격한 휴먼은 뉴욕시 최초로 휠체어를 사용하는 교사가 되었다.
휴먼의 곁에는 항상 어머니가 있었다. 에드 로버츠가 노동운동가 출신 어머니와 함께 싸워 버클리대학에 입학했듯이, 시민운동가였던 휴먼의 어머니는 딸과 함께 교육차별에 맞섰다. 변변한 장애운동 조직이 없던 그 시절에는 어머니들이 가장 중요한 권익옹호자였다.
휴먼이 장애 운동가로 성장하는데, 캠프 제네드(Camp Jened)의 영향이 컸다. 이 캠프는 1951년부터 1977년까지 뉴욕주 헌터 마운트에서 열린 장애 청소년들의 여름 축제였다. 히피문화 추종자들이 캠프를 운영했다. 그러다 보니 참가자들은 노래를 부르고, 게임을 하고, 키스하는 법을 배우고, 심지어 마리화나를 피우며 자연과 자유를 만끽했다. 장애인들의 해방구였다.
휴먼은 9살부터 18살 때까지 해마다 캠프에 참가했다. 대학에 진학한 뒤에는 선배 조언자로 참여했다. 그곳에서 그는 동료 장애인들과 함께 정체성과 연대의식에 눈을 떴다. 실제로, 캠프 참가자들 중 상당수가 성인이 되어 장애운동 특히 자립생활운동에 참여했다. 한국에서 정립회관 청소년 캠프 출신자들이 1980~90년대 장애청년운동의 주역이 된 것과 비슷하다.
당시 촬영한 필름을 편집한 다큐멘터리 <크립 캠프 Crip Camp>(넷플릭스 오리지널)가 2020년에 개봉했다. 이 영화는 선덴스 영화제에서 상을 받았고 아카데미 상 후보에도 올랐다. 영화 속 한 장애 청소년은 이렇게 말한다. “여자 지도교사가 저한테 처음으로 키스하는 법을 가르쳐줬어요, 제 생애 최고의 물리치료였죠!” 그런 아이들 사이로 휠체어를 타고 종횡무진 누비는 20대 초반의 휴먼을 영상에서 만날 수 있다.
휴먼은 1969년에 뉴욕주에 있는 롱아일랜드대학교를 졸업하고, 1975년에는 캘리포니아주립대학교 버클리 캠퍼스에서 공중보건 석사 학위를 받았다. 우연인지 필연인지, 미국 장애운동의 양대 산맥인 에드 로버츠와 주디 휴먼이 한곳에 있었다. 로버츠의 요청으로 휴먼은 1975년부터 1982년까지 버클리자립생활센터 부소장을 역임했다.
이 시기에 그 유명한 ‘504조 투쟁’이 발생했다. 1977년 4월 미국 장애운동가들은 여러 도시에서 보건교육복지부 산하 건물들을 동시다발로 점거했다. 1973년 개정된 재활법을 즉각 시행하라는 요구였다. 73년 재활법에는 연방 정부 예산을 지원받는 모든 기관과 업체의 장애인 차별을 금지하는 504조가 포함되어 있었다. 그런데 닉슨 정부 때 개정된 이 조항이 카터 행정부가 들어섰는데도 시행이 되지 않자 전국의 장애인들이 들고일어선 것이다.
샌프란시스코 책임자였던 휴먼은 100명이 넘는 장애인들을 인솔하여 연방 건물을 점거했다. 다른 도시 점거 농성은 여러 이유로 조기에 종결되었지만, 샌프란시스코 농성은 26일 동안이나 지속되었다. 결국, 카터 행정부는 샌프란시스코 장애인들의 투쟁에 밀려 4월 28일 법률을 시행했다. 이 사건은 미국 역사상 최장기 연방 건물 점거 농성으로 기록되어 있다. 휴먼은 29살 나이에 미국 최고의 “싸움꾼”이 되었다.
휴먼은 자립생활센터 활동을 그만두고 1983년에 에드 로버츠와 함께 세계장애연구소를 설립했다. 그리고 1991년에 어느 장애인 단체 행사에 참석했다가 휠체어를 탄 남성 참석자와 복도에서 어깨를 부딪쳤다. 회계사인 호르헤 피네다였다. 이것이 인연이 되어 둘은 1년도 되지 않아 백년가약을 맺었다.
1993년 클린턴이 대통령으로 당선되자 휴먼은 캘리포니아에서 워싱턴 D.C.로 옮겼다. 그때부터 2001년까지 클린턴 행정부의 특수교육 및 재활 서비스 담당 차관보로 일했다. 2002년부터 2006년까지 세계은행 장애 및 개발 분야 수석 고문으로, 2010년부터 2017년까지는 오바마 행정부 국무부의 국제 장애인 권리 특별 고문으로 일했다.
그리고 최근까지도 전 세계를 돌며 왕성한 활동을 하고 있었는데, 갑작스러운 비보가 날아들었다. 유족의 뜻에 따라 사인은 공개되지 않았다.
그가 잠들자 전 세계에서 애도의 물결이 일고 있다. 그의 개인 홈페이지(www.judithheumann.com)는 “전 세계가 장애 운동가 주디 휴먼의 죽음을 애도한다”는 제목의 부고를 올렸다. 그가 한때 이사로 재직했던 미국장애인연합회(AAPD)는 장애운동의 “어머니”를 잃었다고 애도했다. 워싱턴포스트도 “그녀는 장애운동의 어머니이자 싸움꾼 이었다”고 보도했다. 또 버락 오바바 전 대통령은 트위터에 “주디와 함께 일한 몇 년이 행복했다”고 추모했다.
한 시대의 위대한 실천가를 그리워하며, 주디스 엘런 휴먼의 명복을 빈다.
-장애인 곁을 든든하게 지켜주는 대안언론 에이블뉴스(ablenews.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