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를 들어 자폐인은 디테일(세부사항)에 세심하게 신경쓰고 일처리를 확실하게 한다거나, ADHD 당사자는 자신이 좋아하는 일에 집중력을 폭발적으로 투자할 수 있다. 조현병 당사자는 창의력이 뛰어나고, 양극성 장애 당사자는 생산성이 좋고, 우울증 당사자는 현실을 객관적으로 볼 수 있는 능력이 탁월하다.
이러한 관점은 신경다양성을 홍보하고 사회가 신경다양성을 지지해야 하는 이유를 효과적으로 설명하는 수단인 것처럼 보인다. 온라인 서점 평점 9점대를 기록하며 신경다양성 입문서로 널리 읽히고 있는 ‘증상이 아니라 독특함입니다’라는 책은 신경다양성의 이점을 진화론적 관점에서 설명하고 있다. 세바다에서도 이러한 관점을 전략적으로 채택한 적이 있다.
그러나 신경다양인의 장점‘만’을 부각하는 것은 ‘착한 편견’을 만드는 것에 불과하다. 신경다양인의 이상적인 모습을 설정하고 그 틀에 당사자를 억지로 욱여넣는 것이다. 그러한 이상은 실제 신경다양인의 모습과는 거리가 멀다.
이상에 맞지 않게 행동하는 신경다양인은 ‘신경다양인은 이러한 장점이 있는데 너는 왜 그렇게 행동하냐’는 핀잔을 듣고, 자신의 진정한 모습을 비관적으로 생각하며 마스킹(자신의 신경다양적 특성을 숨기는 것)에 몰두하게 될 것이다. 결국 신경다양성이 다양성을 억압하는 아이러니가 일어나게 된다.
신경다양성에 대한 피상적인 논의가 다른 분야와 결합하면 생기는 일에 대해 소개해보겠다. 지난 2월, 정춘숙 의원의 주최로 ‘느린학습자의 신경다양성을 통한 자립지원 방안’ 심포지엄이 열렸다. 전날에서야 행사 소식을 들은 나는 급하게 참석하여 행사를 참관했다.
그날 발표에서는 신경다양인을 ‘differently abled(다른 능력을 가진 사람)’라고 설명하면서, 신경다양성의 이득에 대한 논문을 소개하고, 해외 유수의 기업들이 신경다양인을 채용하고 있다고 말했다.
나는 이러한 설명이 우려스러웠다. 신경다양인의 장점과 대기업 채용에만 초점을 맞춘 그 발표가 당사자 개개인의 능력을 개발하는 것만 신경쓰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각자도생과 자기계발의 끊임없는 악순환은 능력주의의 가장 큰 병폐이다. 그러한 신자유주의적 생활방식을 능력주의의 가장 큰 피해 집단인 발달장애인과 신경다양인에게 강요하는 것은 불합리해보였다.
발표에서 언급된 회사들이 진정으로 신경다양인 친화적인 사내문화를 가지고 있는지도 의문스럽다. 채용 방식을 바꾸고 신경다양인을 더 많이 채용한다고 해서 그 회사가 신경다양인 친화적인 회사가 되는 것은 아니다. 다양성을 존중하는 사내문화가 조성되어야 신경다양인 직원들도 행복하게 일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 발표에서는 그 회사들이 어떤 사내문화를 가지고 있는지는 별로 언급되지 않았다.
또 하나 지적하고 싶은 점은 이러한 논의들이 신경다양성의 존재 가치와 의의를 신경전형적 사회가 원하는 가치를 생산하는 일로 축소시킨다는 것이다. 신경다양성을 지지해야 하는 이유는 신경다양적인 특성이 잘못된 것이나 제거해야 할 대상이 아니며, 그러한 특성을 다양한 삶의 형태 중 하나로 포용하는 것이 장애의 사회적 모델에 부합하기 때문이다. 신경다양성은 대기업에서 성실하게 일할 인재를 뽑아내는 수단이 아니다. 그것은 신경다양성의 목적이 아니다.
그렇다면 어떤 방식으로 신경다양성에 접근해야 할까? 그것은 당사자의 인권과 기본권, 행복추구권에 맞춰져야 한다. 신경다양성은 당사자의 특성을 자연스러운 삶의 한 방식으로 존중하고, 당사자가 자신의 모습대로 온전히 살아갈 수 있도록 지원한다. 그리하여 당사자의 삶의 모든 국면에서 인권을 보장받고, 사회 통합과 자아실현, 행복한 삶으로 이어질 수 있도록 도울 수 있어야 한다.
신경다양성을 담론을 진정으로 이해하려면 획일적인 가치 생산에만 몰두하는 자세를 버려야 한다. 눈에 보이는 성과에만 매몰되어서 다양성을 말살하는 우를 저지르지 말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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