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계선 지능인, 흔히 지적으로 장애인과 비장애인의 경계에 놓인 사람들을 지칭하는 용어이다. 지능지수(IQ)를 기준으로 본다면 우리나라에는 약 700만 명, 전체 국민의 약 13%가 경계선 지능인(IQ 71~84)으로 추정된다고 한다. 물론 경계선 지능인은 단순히 지능지수로만 평가·분류할 수 없다. 이들이 가진 문제의 원인과 양상은 매우 다양하기 때문이다.
경계선 지능인은 제한된 학습 및 사회 능력으로 인해 일상생활에 어려움을 많이 겪는다. 특히 학교 졸업 후 취업이나 근로생활에 어려움이 많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현재 국내에는 성인기 경계선 지능인의 취업 및 근로생활을 지원하는 제도가 전무하다. 그렇다면 해외에서는 경계선 지능인 취업 지원을 위해 어떤 노력들이 이뤄지고 있을까? 필자는 독일 상황을 한번 조명해 보고자 한다.
교사 지원을 받으며 직업교육수업을 받는 어느 장애인의 모습. ©Andi Weiland | Gesellschaftsbilder.de
독일의 '학습장애인'
우선 독일에는 '경계선 지능인'이란 용어가 거의 사용되지 않는다. 이에 상응하는 개념으로 ‘학습장애(Lernbehinderung)‘란 용어가 통용된다. 아직 학습장애에 대한 정의는 사회적· 학문적으로 통일되지 않았지만, 학습 전반에 걸쳐 지속적인 어려움이 있으나 지적장애인에는 해당하지 않는 사람들이 학습장애인에 속한다. 흔히 학습장애를 '첫눈에 잘 드러나지 않는 장애(Behinderung auf den zweiten Blick)'라고 정의하기도 한다.
참고로 독일에는 특수교육대상자 중 약 40%가 학습장애인이다. 지적장애학생과 정서·행동장애학생이 각각 17 %정도인 점을 감안하면, 학습장애인은 독일 특수교육에서 가장 많은 비율을 차지하는 그룹임을 알 수 있다.
독일학습장애인지원연대에 따르면 독일에는 약 2백만 명의 학습장애인이 있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는 독일 전체 인구의 약 2.4%에 해당한다. 물론 우리나라의 경계선 지능인과 마찬가지로 독일에는 학습장애인에 대한 명백한 진단기준이 아직 부재하고, 학습장애인 관련 공식 통계 역시 없는 상황이다.
학습장애인 근로촉진 법적 근거
2009년 독일에는 유엔장애인권리협약이 발효되면서 직업교육 및 근로생활 분야에도 장애인의 사회통합이 강조됐다. 이후 사회법전 제3권(근로촉진법)이 개정되고 장애인 범주에 학습장애인을 포함한다는 내용이 담기면서, 학습장애인도 근로생활참여지원을 받을 수 있는 법적 근거가 마련됐다. 이후 학습장애인의 근로생활참여지원은 다양한 형태로 이행됐는데, 대표적으로 '전문실행가 직업훈련제도(Fachpraktiker-Ausbildung)'가 있다.
전문실행가 직업훈련: 학습장애인 취업 지원 제도
독일에서 대부분의 지적장애학생은 학교 졸업 후 장애인작업장에 취업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이에 반해 학습장애학생은 장애인작업장에 취업하기에는 능력이 뛰어나고, 직업훈련을 받고 일반 노동시장에 취업하기에는 능력이 부족한 경우가 많다. 이러한 배경에서 독일은 학습장애인의 일반 노동시장 진출을 도모하고자 전문실행가 직업훈련 제도를 신설했다(법적 근거: 직업교육법 제66조, 수공업법 제42조).
전문실행가 직업훈련은 기존의 직업훈련에서 이론교육의 난이도와 비중을 대폭 축소한 직업교육과정이다. 이 과정을 성공적으로 수료한 사람은 '전문실행가(Fachpraktiker)'라는 국가 자격을 부여받는다.
전문실행가는 일반 직업훈련을 수료한 전문가(Fachkraft)와 구분된다. 예를 들어 동물사육 분야에서 일반 직업훈련을 수료한 사람은 '동물사육전문가(또는 동물사육사)'가 되고, 전문실행가 직업훈련을 수료한 사람은 '동물사육 전문실행가'가 된다. 가령 동물사육전문가는 각 동물의 특성을 이해하고 동물사료의 종류와 중량, 비율 등을 직접 측정하고 결정할 수 있는 사람이라면, 동물사육 전문실행가는 정해진 규정에 따라 사료를 배분하고 급여할 수 있는 사람이다. 그렇다고 전문실행가가 전문가의 보조인력인 것만은 아니다. 전문실행가는 전문가의 속도와 수준으로 업무를 수행하진 못하지만, 고유의 영역과 권한을 가지고 전문가와 함께 근무한다.
전문실행가 직업훈련 기간은 2년에서 3년 정도이다. 전문실행가 직업훈련 분야는 사무, 판매, 요양, 원예, 조경, 청소, 요리, 목공, 금속, 서비스, 사회복지, 정보기술 등 다방면에 걸쳐 있다. 전문실행가 직업훈련에 드는 비용은 연방노동청이 전액 부담한다.
사진 2: 사무 분야 전문실행가 직업훈련 홍보 관련 이미지. ©CJD BBW Gera
전문실행가 직업훈련 사례
플로리스트가 꿈인 학습장애인 바네사는 특수학교 졸업 후 3년 과정의 화훼 전문실행가 직업훈련을 받고 있다. 1년에 3개월 정도는 직업학교에서 이론교육을 받고, 나머지 기간에는 꽃집에서 실습교육을 받는다.
바네사는 직업학교에서 이론교육을 받을 때 다른 학생들과 동일한 수준을 달성할 필요가 없다. 예를 들어 어려운 라틴어 용어 대신 쉬운 독일어 개념만 이해하면 된다. 고난이도 꽃꽂이 기술을 배우는 대신 꽃 줄기를 일정한 길이로 자르거나 정해진 규격에 맞추어 꽃 장식을 만드는 연습만 하면 된다.
바네사는 직업훈련을 통해 각종 도구와 장비 사용법 알기, 꽃과 화초 장식하기, 고객 응대하기 같은 내용을 배우고 이를 현장에서 훈련한다. 바네사는 꽃집에서 꽃을 종류별로 진열하고 포장하고 청소하고 고객응대 등 대부분의 업무를 수행할 수 있다. 단지 계산을 하는 상황에서는 직장동료의 도움이 필요하다.
사진 3: 화훼 전문실행가 직업훈련 홍보 관련 이미지. ©CJD BBW Gera
전문실행가 직업훈련에 대한 엇갈린 시각
독일에는 학습장애인을 위한 전문실행가 직업훈련제도를 두고 목소리가 분분하다.
일부에서는 전문실행가 직업훈련이 장애인을 위한 특별 조치이므로 이는 유엔 장애인권리협약이 명시하는 사회통합 원칙에 위배된다고 주장한다. 따라서 전문실행가 직업훈련 같이 특화된 장치보다는, 장애인이 일반 직업훈련제도 속에서 비장애인과 함께 직업교육을 받을 수 있는 방안을 촉구한다. 앞서 언급한 바네사의 경우는 비장애인과 함께 교육을 받는 직업학교에 재학을 하지만, 실제로 전문실행가 직업훈련과정은 장애인만을 위한 직업교육기관(Berufsbildungswerk)에서 실시되는 경우가 많다.
세계적으로 인정받는 독일의 이원화 직업교육은 수준과 난이도가 높은 탓에 학습에 어려움이 많은 사람들이 따라가기 힘든 것이 현실이다. 따라서 전문실행가 직업훈련이라는 관문을 통하여 학습장애인에게 국가 공인 자격을 부여하고 일반 노동시장에 취업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는 것은 사회통합 원칙에 부합한다는 의견도 많다. 게다가 전문실행가는 이후 계속교육(Weiterbildung) 같은 추가교육프로그램을 통해 전문가로 승격될 수 있다.
전문실행가는 정규 숙련근로자보다 임금이 낮지만, 해당 직무에 대한 경험이 없거나 경험이 많이 부족한 비숙련 근로자보다는 직무능력이 높기 때문에 실제로 기업들이 선호하는 인력이기도 하다. 현재 노동인력이 절대적으로 부족한 독일에서 전문실행가는 또 다른 대안으로 각광받는 추세이다.
사진 4: 요리 전문실행가 직업훈련 홍보 관련 이미지©CJD BBW Gera
우리나라에도 경계선 지능인을 위한 취업 기회가 열리기를
필자는 국내 경계선 지능인을 위해 독일의 전문실행가 직업훈련 같은 제도를 국내에 그대로 도입할 것을 주장하지 않는다. 사실 독일 제도를 우리나라에 이식해 꽃을 피우기란 거의 불가능한 일이다. 왜냐하면 우리나라와 독일의 교육제도, 직업훈련 시스템 , 문화 등이 너무 다르기 때문이다.
게다가 '직업교육'에 대한 우리나라와 독일의 인식 차이도 매우 크다. 독일에는 이원화 직업교육(직업학교의 이론교육과 기업의 실습교육을 병행하는 형태)을 성공적으로 수료한 사람이 대학졸업자만큼 인정을 받는다. 직종에 따라서는 대학졸업자보다 더 많이 인정을 받는다. 그러나 우리나라에는 여전히 대학졸업장이 취업 전제조건이다. 아무리 전문적인 직업교육을 받은 사람이라도 대학졸업장이 없으면 사회에서 제대로 인정받지 못하는 게 우리나라 현실이다.
독일에는 전문실행가도 사회에서 당당하게 인정받는다. 만약 우리나라에도 전문실행가 같은 전문인력이 양성된다면 과연 이들이 사회에서 얼마만큼 인정받을 수 있을까?
따라서 독일 제도를 참고하되 국내 상황과 여건에 맞추어 우리나라만의 제도를 만들고 발전시켜 나갔으면 한다. 현재 국내에는 경계선 지능인을 위한 지원센터설립, 진로탐색 및 직업훈련 프로그램 마련 등 여러 방안을 마련하기 위해 노력하는 모습이 곳곳에 보인다.
하지만 이와 동시에 또는 이보다 앞서 필요한 일은, 경계선 지능인에 대한 사회적 인식 제고 및 사회적 환경 개선이다. 경계선 지능인이 사회에 ‘흡수되도록‘ 노력할 것이 아니라, 우리 사회가 경계선 지능인을 포용할 수 있도록 이들의 능력과 가능성 그리고 다양성을 발견하고 인정하고 존중하는 사회가 되도록 우리 모두가 노력해야 한다.
우리나라에는 경계선 지능인을 '느린 학습자'라고 부르기도 한다. 느린학습자는 단순히 학습속도가 느린 사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느린학습자는 학습에 시간과 지원을 더 많이 필요로 하는 사람을 의미한다. 바꿔 말하면, 우리는 느린학습자에게 시간과 지원을 더 많이 제공하면 된다.
독일 전문가들은 학습장애인 직업훈련이 성공하려면 첫째, 작업 지침이 명확해야 하고, 둘째, 학습장애인이 달성해야 하는 목표를 분명히 정의해야 하고, 셋째, 학습장애인이 언제든지 질문 하거나 도움을 요청하도록 적극 격려하며, 넷째, 직업교육 수준을 천천히 향상시키고, 비장애인보다 더 많은 시간을 제공해야 한다고 조언한다. 이것은 우리나라의 경계선 지능인에게도 똑같이 적용되어야 할 원칙이다.
※이 글은 독일에 거주하는 에이블뉴스 독자 민세리님께서 보내온 글입니다. 에이블뉴스는 언제나 애독자 여러분들의 기고를 환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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