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버트 조지 마틴 경(Sir Robert George Martin)의 살아생전 모습. ⓒPeople First New Zealand 페이스북
노동절인 지난 1일 나의 절친을 통해 비보를 접했다. 지적장애인 당사자 단체인 피플퍼스트 뉴질랜드의 평생회원이자, 8년 전 유엔 장애인권리위원회에서 지적장애인 최초로 권리위원에 당선된 로버트 조지 마틴 경(Sir Robert George Martin)이 우리 곁을 떠났다.
유엔 장애인권리위원회 30차 세션 때도 정정하신 모습이었는데, 한 달 후 갑작스럽게 세상을 떠나셨다니, 나로선 충격으로 다가왔다. 그와 함께 사랑을 나누었던 아내 린다 여사와 친구들, 당사자 단체인 피플퍼스트 뉴질랜드의 회원들은 그의 갑작스러운 죽음에 상당히 슬퍼했을 것 같다. 이들의 슬픔에, 나도 함께 하고픈 마음이다.
로버트 마틴 경이 살아생전 장애인 인권과 관련돼 늘 관심을 가졌던 주제가 있었다. 장애인 당사자의 직접적인 정치참여, 쉬운 정보의 필요성, 성년후견 폐지 및 시설수용 종식 등이 그것이었다.
필자로선 1년 8개월 전, 2022년 8월 23일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대한민국 정부는 장애인권리위원회의 제2·3차 심의를 이틀 앞둔 상태였다. 그때, 민간대표단의 일원으로 필자가 참여했던 장애인권리협약 정부심의 대응연대에서 대한민국의 지적·자폐성 장애인의 권리 현실에 대해 30분 정도 장애인권리위원회 위원인 로버트 조지 마틴 경에게 알리는 시간을 가졌다.
당시 필자는 자폐인 당사자로서 신경다양인 및 자폐성 장애인의 사회 참여 현실을 알렸다. 정부와 부모가 신경다양인과 자폐성 장애인의 의사를 존중하지 못하고 무시하면, 이들의 정책 및 사회 참여가 제한되는 현실은 계속 유지될 것이라고 로버트 조지 마틴 경에게 말했다. 거기에 있는 사람들이 이견을 달지는 않았고, 수긍하는 분위기였던 것으로 기억한다.
당시 유엔 장애인권리위원회이었던 로버트 마틴 경이 1년 8개월 전 대한민국 정부를 상대로 한 2·3차 정부심의 때 지원자의 지원을 통해 지적·자폐성·심리사회적 장애인의 정책·사회 참여에 대해 질의했던 모습. ⓒUN Media 동영상 캡처
다음 날 대한민국 정부심의 때, 마틴 경은 지적·자폐성·심리사회적 장애인에게 영향을 미치는 정책에 이들 당사자들과 논의하지 않는다는 정보를 들었다며, 이런 문제를 다루기 위해 어떤 계획이 있는지 말해달라는 질의를 정부에 던졌다. 이에, 정부는 장애인단체들이 장애인 인권향상을 위해 중요 역할을 하도록 프로그램 예산을 확보해 지원하고 있고, 제6차 장애인정책종합계획을 추진하는 실무작업반에도, 장애인단체가 참여하고 있다고 답변했다.
하지만 지적·자폐성·심리사회적 장애인 당사자들은 당시 제6차 장애인정책종합계획을 위한 의견을 말하는 자리조차 초대받지 못했고, 당사자들의 부모와 관계자 등이 이 계획을 세우는 데 참여했다. 위원회에서 이런 현실을 인식해서인지, 대한민국 정부에게 권고하는 제2·3차 최종견해에 협약 이행·모니터링과 관련해 자폐성 장애인 등을 포함한 모든 장애인단체의 의미 있는 참여를 보장하라는 내용을 넣었다.
우리나라 정부심의 때만 그런 질문을 한 게 아니었다. 독일, 오스트리아 등 여러 나라 정부심의 때도 일관되게 정신적 장애인의 의미 있는 정책·사회 참여가 이뤄지는지를 마틴 경은 종종 질의했다. 그래서 왜 그랬을까를 생각해봤다.
그가 한때는 유엔 장애인권리위원으로 활동하기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은 시점에 대한민국을 방문한 적이 있었는데. 당시 ‘우리 없이 우리에 대해 말하지 말라(Nothing about us, without us)’라는 말은 지적장애인에게도 적용된다며, 이 구호에 우리를 배제하지 말라는 내용의 인터뷰를 한 언론매체와 했었다(출처: '에 코레 아노', 배제와 격리 없는 사회 향한 로버트 마틴의 여정, 비마이너 2017년 5월 18일 기사).
생각해보면, 결국 로버트 마틴 경 자신도 장애인권리위원회 위원이 되기 전 지적장애인들에게 영향을 미치는 정책 논의 시 지적장애인 의견이 배제되는 현실을 몸소 겪었던 적이 적지 않았음을 짐작하게 된다. 이런 배제의 현실(그렇지 않은 국가도 있겠지만 말이다.)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던 마틴 경이었기에 그가 정부심의 시 단순한 것 같지만 중요한 이 질의를 종종 던진다는 걸 느낄 수 있었다.
한편으론 여러 나라 민간대표단들로부터 지적·자폐성·심리사회적 장애인의 정책·사회 참여 배제 현실을 증거자료들을 통해 권리위원 자격으로 그가 종종 들었기에 그런 질의를 종종 던지지 않았나 하는 생각도 해보게 된다.
그런 질의를 통해 지적·자폐성·심리사회적 장애인들도 다른 장애 유형이 있는 사람들, 그리고 신경 전형인들과 마찬가지로 이 사회에서 동등한 사회구성원이자, 권리의 주체로 삶을 살길 간절히 바라는 강한 의지를 로버트 마틴 경에게서 보게 된다. 이런 그에게 깊은 존경의 박수를 보내고 싶은 마음이며, 아직도 지적·자폐성 장애인의 정책·사회 참여가 배제되는 현실을 이제는 정말 깨부셔야 한다는 생각이 마틴 경이 정부심의 시 종종 던졌던 절의를 통해 들게 된다.
장애인권리위원회의 2·3차 정부심의 전날 장애인권리협약 정부심의 대응연대에서 유엔 장애인권리위원이었던 로버트 조지 마틴 경에게 30분 동안 대한민국 지적·자폐성 장애인의 권리 현실에 대해 알리는 장면. ⓒ장애인권리협약 정부심의 대응연대
8월 23일 당시엔 대한민국 성년후견에 관한 현실도 마틴 경이 듣게 됐다. 공익인권법재단 희망을 만드는 법의 김재왕 변호사가 당사자의 선호와 의지를 확인할 방법이 없는 데다, 후견 종료된 예가 거의 없는 게 성년후견제의 현실임을 그에게 전했다. 이를 들은 마틴 경은 대한민국 정부심의 때, 피후견인의 의사가 사실상 박탈된 게 성년후견제도라며, 지원의사결정제도로 바꾸어야 하는데, 이를 위한 예산과 일정이 준비됐는지 알려달라는 질의를 당사자의 눈으로 날카롭게 던지기도 했다.
언어만이 공식적으로 인정받고, 언어 외의 다양한 표현수단이 인정되지 않는 신경전형적 사회에서 당사자의 선호와 의지를 확인할 방법이 없으니 선택을 확인하기 어렵다 하여, 자기결정권과 선택권을 빼앗는 시설로 수용될 수밖에 없다는 논리를 통해 실제로 시설수용이 만연한 게 수많은 국가들에서 보는 현상들이다. 성년후견과 시설수용이 뭔가 연결되는 지점이 있지 않은가?
즉 성년후견과 시설수용은 정신적 장애인의 자립, 독립생활과 반대되는 방향인 거다. 시설수용과 관련해선 마틴 경이 어린 시절 10여 년 동안을 시설에서 살았던 경험이 있었던지라, 장애인권리위원회 위원으로 활동하면서 그 경험을 이야기할 기회가 그에게 종종 주어졌다.
7년 전 마틴 경이 한국을 방문했을 당시, 필자는 강연회를 통해 그에게서 10여 년 동안 시설에서 살았던 경험을 듣게 되었는데, 거기선 학교에 가지 못하고, 자기결정권과 선택권이 없는 삶을 살았단다. 15세가 되던 어느 날, ‘아침 5시에 일어나 왜 일해야 하지?’란 의문 속에 로버트 마틴 경은 시설 농장에서의 부당한 노동 강요에 파업을 선언하며, ‘불평할 자격이 없다’는 관리자의 말에도 ‘오늘 일하지 않겠으니 대신 대화를 하자’고 자신의 권리를 주장하기 시작했단다.
그러면서 그는 지적장애인을 포함해 모든 사람들이 자유로워야 한다며, 권리를 침해하지 않도록 시설을 없애는 게 중요함을 피력했다(출처: 유엔최초 발달장애인 위원 “시설 폐쇄” 일침, 에이블뉴스 2017년 5월 18일 기사). 그러니까, 마틴 경은 시설에서의 삶의 경험을 통해 시설 폐지 및 시설수용 종식에 대한 확고한 생각을 가지게 된 거다.
이런 삶의 배경이 있었기에, 대한민국 정부심의 때, 그는 정부에 “탈시설의 정확한 시기와 일정, 그리고 얼마만큼의 예산이 투여될 계획인지 일반논평 5호에 기반해 설명해달라”고 질의할 정도였다. 1년 8개월 전 유엔에서 발간한 탈시설 가이드라인을 만드는 데도 그의 역할은 가히 중심적이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작년 7월 18일 국가인권위원회, 전국탈시설장애인연대, 한국정신장애인연합회 공동주최로 서울 온드림소사이어티 ONSO스퀘어에서 개최된 탈시설·탈원화 이행을 위한 유엔 탈시설 가이드라인 발표회 전경. ⓒ이원무
이런 그의 활약 덕에 우리나라 장애계 단체 등에서 탈시설 가이드라인을 번역하기에 이르렀고, 대한민국 피플퍼스트에선 그 가이드라인 번역물을 알기 쉬운 표현과 언어로 바꾸는 작업을 했다. 유엔 장애인권리위원회 김미연 위원이 피플퍼스트에 있는 지적·자폐성 장애인 당사자들에게 탈시설 가이드라인의 개요와 내용에 대해 개략적으로 설명하는 시간을 가지기도 했다.
그런 과정들 속에 지적·자폐성 장애인 당사자들은 탈시설의 필요성·중요성을 구체적으로 자각하기 시작했고, 이후 이들은 시설수용에 대해 국가가 배상하고 사과하라고 요구하기까지에 이른다. 얼마 전에는 이들이 서울시의회에서 자신들의 탈시설을 반대할 권리는 없다는 외침까지 했다. 마틴 경의 탈시설에 대한 열정과 확신이 우리나라에까지 전달됐을 정도니 그의 영향력은 대단하다고 느껴지게 된다.
성년후견 폐지 및 시설수용 종식이 우리나라에서 꿈이 아닌 현실이 된다면, 지적·자폐성·심리사회적 장애인이 사회에서 기본권과 자유를 향유하며 살아갈 수 있을 거란 상상만 해도 기분이 좋아진다. 그런 사회를 만들 수 있도록 나 자신부터 다시금 돌아보고 노력해야겠다는 생각을 해본다.
마지막으로 마틴 경은 유엔의 공식 회의나 문서에서 어려운 단어들이 많다는 점을 지적하며, 이를 수정해 지적장애인 친화적인 시스템을 유엔에 만들어내야 한다는 의견을 피력했다. 한 마디로 쉬운 정보의 중요성을 강조한 거다. 그 덕에 유엔 공식 문서나 회의에 쉬운 버전이 등장하기 시작했다. 이를 통해 지적장애인을 포함한 장애인의 유엔 문서, 회의에 대한 접근성은 전에 비해 증진됐다. 그 중심에 마틴 경이 있었다.
이렇게 마틴 경은 전 세계 학습장애인, 지적장애인, 자폐성 장애인 등의 권리 증진을 통해 모두가 평등한 세상을 실현하기 위한 일에 용기를 가지고 헌신해 왔다. 그런 그가 노동절 날 운명을 달리한 것이다.
뉴질랜드의 거대 사회복지서비스 제공기관인 IHC의 랄프 존스(Ralph Jones) 최고책임자는 고인이 된 마틴 경을 기리며, 뉴질랜드만이 아닌 전 세계 장애인의 삶에 진정한 차이를 만들어낸 것이 그가 남긴 유산이라고 전했다. 그가 소속됐던 유엔 장애인권리위원회는 물론 뉴질랜드 의회, 지적장애인과 그 가족을 위한 글로벌 단체인 인클루전 인터내셔널(Inclusion International) 등지에서도 그를 향한 애도의 물결이 이어지며 고인의 업적을 기리고 있다.
마틴 경이 바라던 정신적 장애인의 자유롭고 평등한 삶을 현실로 다가오게 만드는 건 이제 필자를 포함해 전 세계 자폐성 장애인, 지적장애인, 심리사회적 장애인의 몫으로 남게 됐다. 다시금 그 일에 어떤 식으로든 함께 하겠다는 다짐을 해보며, 이제 고인이 된 마틴 경의 안식을 기원한다.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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