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는 미국에서 7월에 교통사고가 났습니다. 4달을깨어나지 못하고 12월에 깨어났습니다.
한국의 아무 병원으로 옮겨왔습니다. 미국에서 한 수술에 문제가 있어 신경외과에서 재수술을 받고 재활 의학과로 옮겨졌습니다.
첫날 저의 주치의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재활의 목표는 벌떡 일어나서 뚜벅뚜벅 걷는 것이 아닙니다. 휠체어를 타고 목표하는 곳에 잘 가는 것이 목표입니다.”
예, 장애인 생활 몇 년 해보니 정확하게 맞는 말씀이셨습니다. 하지만 그것이 입원한 첫날 환자에게 할 말은 아니었습니다.
저의 주치의는 제 쪽박을 깬 것입니다. 쪽박에 현재 먹을 것이 있든 없든 그건 중요하지 않습니다. 쪽박은 소유자에게 앞날의 희망이기 때문입니다.지금 배고파도 내일을 기다리게 하는 것이 쪽박입니다. 쪽박을 깬다는 것은 소유자의 미래에 있는 희망을 없애는 것입니다.
영화 “피아노”에 쪽박을 깨는 사람이 나옵니다. 그는 여주인공 에이다의 남편 스튜어트입니다. 20대 미혼모인 여주인공 에이다는 말을 못합니다. 6살때 말을 하지 않기 시작했습니다. 이유는 아무도 모릅니다. 자신도 모릅니다. 소통이 막힌 에이다는 피아노가 대화 상대입니다. 피아노는 에이다의 쪽박입니다.
그녀는 스코틀랜드 태생입니다. 아버지의 명령으로 딸과 피아노와 함께 뉴질랜드까지 시집을 옵니다.
남편운 말을 못하는 것은 상관없다고 했습니다. 신도 말 못하는 사람을 사랑하신다고 했습니다.(침묵의 인내가, 영원하기를‧‧‧하지만 영화의 경우 앞부분에서 밝게 강조되는 것은 반드시 후반부에서 어둡게 변질 되는 것이 드라마 트루기입니다.)
남편은 뉴질랜드 사업가입니다. 땅을 사고파는 일을 합니다. 에이다는 딸, 피아노와 함께 뉴질랜드에 왔습니다. 남편은 무거운 피아노를 바닷가에 그냥 버려두고 에이다와 딸 만을 데리고 집으로 갑니다.
영화 처음부터 끝까지 영상은 짙은 회색빛 색조입니다. 짙은 회색으로 보여지는 파도, 숲 등은 원시림 뉴질랜드와 꽤 잘 어울립니다. 마치 인간의 본능이 살아있는 태초의 느낌입니다.
피아노 없이 못사는 에이다는 바닷가에 사는 남편 친구 베인즈에게 피아노를 옮겨줄 것을 부탁합니다. 베인즈 역시 원주민으로 피아노를 알 리 없습니다. 그런 베인즈가 변합니다. 해변에서 피아노를 치는 피부가 하얀 여자 에이다, 음악이 배경인 양 파도가 일렁이고, 바닷가에서는 딸 플로라가 꽃을 들고 피아노 음악에 맞춰 춤을 춥니다.
베인즈는 소리로 피아노를 안 것이 아니고, 풍경으로 피아노에 빠졌습니다. 사실은 에이다에게 빠졌지요. 베인즈는 에이다의 남편에게 자기 땅을 사라고 합니다. 돈이 없다고 거절하자, 땅값으로 피아노를 달라고 합니다.
계약조건이 있습니다. 에이다가 자기 집에 와서 피아노를 칠 때 자기가 무슨 행동을 해도 좋다는, 그래서 그 행동을 값으로 쳐서 어느 정도 값이 되면 피아노를 ‘돌려주겠다’입니다.
베인즈가 에이다의 벗은 팔뚝을 만지려 하자 에이다가 거부합니다. 베인즈는 얼른 제안합니다. 이건 건반 2개 값! 이쯤 되면 뒤에 이야기가 대충 짐작되시지요?
에이다는 피아노를 아껴주는 베인즈와 사랑에 빠집니다. 딸 플로라는 자기 아버지에게 피아노 치는 엄마의 모습을 엿보게 합니다. (비밀의 노출은 영화를 재미있게 하는 기술입니다. TENSION과 ANTICIPATION이 동시에 상승하지요.)
딸 때문에 이 사실을 알게 된 남편은 화가 납니다. 도끼를 집어 듭니다. 에이다의 검지손가락을 잘라버립니다. 이제 에이다는 쪽박이 깨졌습니다. 철판으로 손가락을 만들어서 피아노를 칩니다. 잘 쳐질 리 없습니다.
남편에게 손가락이 잘려서 의수로 피아노를 치는 에이다. ©피아노
이 사건이 일어난 후 친구 베인즈가 사는 곳을 떠난다고 하자, 남편은 에이다와 피아노를 그에게 보냅니다. 같이 배를 타고 가던 에이다는 베인즈에게 피아노를 바다에 던지라는 요구를 합니다.
베인즈가 피아노를 던집니다. 피아노 다리와 끈으로 묶인 에이다가 같이 바다에 빠집니다. 에이다가 죽냐구요? 아닙니다. 에이다는 피아노와 묶여있는 끈을 잘라버리고 바다 위로 올라옵니다. 이제 그녀에게는 피아노가 쪽박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바다 위 타고 가던 배에는 또 다른 피아노, 베인즈가 있었습니다.
주치의가 깬 제 쪽박 대신 저는 하나님이라는 다른 왕박을 만났습니다. 그러니 억울할 것도 없습니다만. 앞에서 한 저의 이야기는 이렇게 이어집니다. 지난주 요새 치료를 해주시는 물리 치료사에게 그 과거 이야기를 했습니다. 그 주치의의 말이 옳다고 하셨습니다. 현실을 정확하게 전달해야 한다는 겁니다. 희망 고문을 주면 안된다는 겁니다.
의사의 개성에 따라 입장이 다를 것이라는 생각을 합니다. 하지만 저의 의견을 회수하고 싶지 않습니다. 그것은 쪽박을 깨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걸을 수 있다는 것은 환자인 제가 붙잡고 내일을 맞을 수 있게 하는 쪽박이었기 때문입니다. 각자 가지고 계신 쪽박을 잘 보호하시길 빕니다. 다른 사람의 쪽박도 깨지 않으시길 부탁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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