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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하철역 부딪침 사고 시각장애인의 하소연

  • 작성일: 중구나눔

지하철역 부딪침 사고 시각장애인의 하소연

점자블록 따라 걷다 어르신과 충돌 ‘1만5천원’ 배상

너무나 좁았던 점자블록과 우대권 발급기 간격 때문

한 나그네가 캄캄한 밤길을 걸어가고 있었다. 낯선 길인 데다 길이 험하여 걸어가기가 매우 힘들었다. 나그네가 조심조심 더듬거리고 있는데 뜻밖에도 앞쪽에서 등불이 반짝이는 게 보였다. 반가운 마음에 등불 가까이에 다가간 나그네는 깜짝 놀랐다. 등불을 든 사람이 시각장애인이기 때문이었다.

나그네는 “앞을 보지 못하는 분이 왜 등불을 들고나오셨습니까?”하고 물었다. 그러자 그 시각장애인이 말하기를 “나는 등불이 필요 없지만 다른 사람에게는 도움이 될 것이기에 들고나왔지요.”라고 대답했다. 등불을 든 시각장애인 이야기는 탈무드에 나오는 이야기라고 한다.

캄캄한 밤길에 시각장애인이 등불을 든 것은 자신을 위해서가 아니라 타인을 위한 것이라고 했다. 그런데 탈무드는 2천년 전의 이야기다. 2천년이 지난 현대에서도 시각장애인의 등불 같은 역할을 하는 것이 있으니 바로 흰지팡이다.

시각장애인이 길을 갈 때는 흰지팡이를 짚고 간다. 흰지팡이는 탈무드에 나오는 시각장애인의 등불처럼 어두운 곳에서도 잘 보이는 야광 띠가 붙어 있어서 밤에도 잘 보인다.

시각장애인의 흰지팡이. ⓒ이복남에이블포토로 보기 시각장애인의 흰지팡이. ⓒ이복남
시각장애인의 흰지팡이는 시각장애인이 흰지팡이를 이리저리 더듬어서 길 앞을 감지하므로 시각장애인에게는 길잡이가 된다. 그리고 흰지팡이는 시각장애인을 의미하므로 누구든지 흰지팡이를 보면 그 사람이 시각장애인이라는 것을 알고 피하라는 의미도 있다.

<도로교통법> 제49조(모든 운전자의 준수사항 등) ①항 2호 “나. 앞을 보지 못하는 사람이 흰색 지팡이를 가지거나 장애인 보조견을 동반하는 등의 조치를 하고 도로를 횡단하고 있는 경우” 모든 운전자는 일시 정지해야 한다.

그외에는 어디에도 흰지팡이를 가진 사람이 우선해야 한다는 내용은 없지만 혹여 흰지팡이를 가진 시각장애인이 다른 사람과 부딪쳤을 때는 <도로교통법>의 이 조항에 준해서 합의를 한다고 한다. 얼마 전에도 한 시각장애인이 지하철에서 다른 사람과 부딪쳤는데 그 사람이 다쳤다고 해서 시비가 붙은 적이 있었다. 그 후 어떻게 되었는지 물어보니 보험회사에서 처리를 해 주어서 잘 모르겠다고 했다.

시각장애인이 흰지팡이를 짚고 가다가 다른 사람과 부딪쳤거나 차량이나 건물의 유리부분을 지팡이로 손괴되었다고 해도 고의가 아니므로 형사적으로는 처벌할 수 없다. 그러나 과실로 다치거나 재물이 손괴되었다면 민사적으로는 손해배상의 책임은 있다고 한다.

요즘은 활동지원사가 있어서 흰지팡이를 짚고 혼자 다니는 시각장애인이 그렇게 많지는 않지만, 필자 사무실 근처에 부산가톨릭맹인선교회가 있어서 가끔은 길에서 흰지팡이를 만난다. 길에서 흰지팡이를 짚은 시각장애인을 만나면 그가 가는 선교회까지는 안내해 주기도 한다.

대부분의 중앙도로에는 점자블록이 다 있다. 점자블록은 두 종류가 있는데 직진하라는 선형과 멈추라는 점형이 있다. 대부분의 점자블록은 300mm*300mm*7mm 크기의 PVC합성고무로 되어 있는데 선형은 일직선이고 점형은 작은 점이 블록하게 성형되어 있다. 아래 그림은 직진의 선형과 멈춤의 점형이 함께 표시되어 있다.

선형과 점형이 표시된 점자블록. ⓒ이복남에이블포토로 보기 선형과 점형이 표시된 점자블록. ⓒ이복남
며칠 전 오후, 시각장애인 A 씨가 전화를 했다. A 씨가 상황은 끝났지만, 자기는 억울하다고 약간은 흥분된 목소리였다. A 씨의 이야긴즉슨 A 씨가 부산 지하철 두실역에서 흰지팡이를 짚고 선형블록을 따라가다가 누군가와 부딪쳤단다.

우대권 발매기에서 무인표를 발급받으려는 어르신이었는데, 그 어르신이 서 있던 자리가 블록 2개로 되어 있는 점형블록이었다. 어르신은 흰지팡이를 보지 못했고 흰지팡이에 걸려 넘어지는 바람에 안경다리가 부러졌다고 했다.

그래서 옥신각신 시비가 붙었고 다툼이 일어난 자리가 바로 두실역 역무원 사무실 앞이어서 직원이 나와 보았으나 시비를 가릴 수가 없어 경찰을 불렀단다. 어르신은 안경다리가 부러졌으니 수리비 3만 원을 내라고 했고, 시각장애인이 자기는 잘못이 없다고 했다.

A 씨 : “경찰도 어떻게 할 수도 없으니 두 사람이 알아서 하라고 했고, 어르신이 술도 한잔하신 것 같아 1만 5천 원에 합의하고 끝냈습니다.”

A 씨는 1만 5천 원을 주고 그 사건은 일단락 되었지만, 점자블록이 잘못된 것 같다며 한번 봐 달라고 했다. 자기가 알기로는 점자블록하고 자판기하고 너무 가까워서 부딪칠 수 밖에 없었다는 것이다.

두실역 점자 블록하고 너무 가까운 우대권 발급기. ⓒ이복남에이블포토로 보기 두실역 점자 블록하고 너무 가까운 우대권 발급기. ⓒ이복남
다음날 오후에 두실역으로 가 봤다. A 씨의 말처럼 선형블록을 따라가다 보면 점형블록이 두 개 있었는데 오른쪽에 우대권 발급기가 있었다. 점형블록과 우대권 발급 사이는 30cm 쯤 되는 것 같았다. 그래서 우대권을 발급하려는 사람은 점형블록 위에 서 있을 수 밖에 없었고 우대권을 발급 받기 위해서는 돌아서 있었기에 선형블록을 따라오는 흰지팡이를 못 볼 수도 있을 것 같았다.

역무원 실에 들어가서 필자를 소개하고 어제의 일을 물었더니, 얘기는 들었지만 어제 근무한 사람이 오늘은 비번이라서 저녁에야 온다고 했다.

이럴 땐 어떻게 해야 하나? 시각장애인의 복지와 생활에 대해 일가견이 있으신 에이블뉴스 서인환 컬럼니스트에게 자문을 구했다. 시각장애인선형블록을 따라가고 있었고 어르신은 우대권을 발급 받느라고 돌아서 있어서 흰지팡이를 보지 못했으니 누구의 잘못이라고 할 수는 없겠지만, 1만 5천원에 해결했다니 다행이라며, 똥밟았다고 생각하라고 했다.

두실역에는 기둥과 자판기 사이에 점자블록이 있었다. ⓒ이복남에이블포토로 보기 두실역에는 기둥과 자판기 사이에 점자블록이 있었다. ⓒ이복남
개가 점자블록 위에 똥을 쌌는데 시각장애인이 모르고 그 길을 갔다면 똥을 밟을 수밖에 없었을 테니 어쩌겠는가? 미국에서 어느 시각장애인이 흰지팡이를 짚고 길을 가는데 한 아가씨가 흰지팡이 보고 피하려고 하다가 넘어져서 다리를 다쳐 손해 배상을 청구했는데 시각장애인이 이겼다고 했다.

이번 사건은 우대권을 발급 받으려는 어르신이나 흰지팡이를 짚고 선형블록을 따라가던 시각장애인이나 그 누구의 잘못도 아닌 불가항력의 사고였다. 문제는 두실역은 기둥과 우대권 발급기 사이에 점자블록이 있었는데 점자블록에서 멈춤을 표시하는 점형블록은 최소한 가로세로 4장은 있어야 하는데 세로로 2장 밖에 없었으니 누구라도 부딪칠 수 밖에 없는 구조였다.

따라서 우대권을 발급 받으려는 어르신이 점형블록 위에 서 있어서, 시각장애인점형블록을 인지하지 못하고 어르신과 부딪쳣던 것이다.

두실역을 다녀오면서 부전역에서 내렸는데 부전역은 역사도 넓었고 우대권 발급기 앞의 점자 블록도 멈춤표시의 점형블록은 6장이나 되는 등 그런대로 점자블록은 제대로 되어 있는 것 같았다. 부산역에도 가 보았다. 부산역은 아주 넓어서 점자블록이 가로세로 30cm라는데 부산역의 우대권 발급기는 선형블록에서 4m쯤 떨어져 있었다.

우대권 발급기 부산역(좌) 부전역(우). ⓒ이복남에이블포토로 보기 우대권 발급기 부산역(좌) 부전역(우). ⓒ이복남
이번 사건을 보면서 우대권을 발급 받으려는 어르신이 잘못했다고 볼 수도 없고, 물론 흰지팡이를 짚고 가는 시각장애인도 잘못하지 않았다. 문제는 우대권 발급기와 점자블록 사이가 너무 좁았다는 것이다. 이런 일은 앞으로도 얼마든지 또 생길 수 있을 것 같은데 그렇다면 뭔가 수정을 좀 해야 할 것 같았다.

그렇다고 점자블록을 옮길 수는 없을 테고, 우대권 발급기를 다른 곳으로 옮겨야 하지 않을까 싶어 부산교통공사로 전화를 해서 자초지종을 설명했다. 부산교통공사에서도 잘 모르는 일인 듯 조사해 보겠다고 했다.

며칠 후 부산교통공사 시설과에서 현장을 확인해 보니 점자블록과 우대권 발급기 간의 간격이 너무 좁아 충돌사고는 어쩔 수 없었던 것 같다고 했다. 그렇다고 점자블록을 옮기기는 어려우므로 우대권 발급기를 다른 곳으로 옮길 수 있는 방안을 검토 중이라고 했다. 잘못된 곳은 이렇게나마 고칠 수 있어서 그나마 다행인 것 같다.

* 이복남 기자는 에이블뉴스 객원기자로 하사가장애인상담넷(www.gktkrk.net) 원장으로 활동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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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복남 기자 (gktkrk@naver.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