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이블뉴스 김익환 칼럼니스트】대한민국 대표 성우, 서혜정. <엑스파일>의 스컬리, <롤러코스터-남녀탐구생활>의 차분하면서도 신랄한 내레이션 등 그녀의 목소리는 우리 일상 깊숙이 스며들어 있다. 수많은 캐릭터에 생명력을 불어넣으며, 때로는 지적이고, 때로는 코믹한 연기로 대중을 사로잡은 지 40년이 넘었다. 여기서 한 발 더 나아가 이제는 ‘서혜정낭독연구소’를 운영하며 낭독의 힘을 전파하고 있다. 지난 4월 15일, 서부노인전문요양센터에서 어르신들과 함께 낭독 수업을 진행 중인 서혜정 성우를 만났다.

40년 경력의 베테랑 성우 서혜정. ©김익환
먼저 본인 소개를 부탁드립니다.
저는 KBS 성우극회 성우 서혜정이라고 합니다. 지금은 서혜정낭독연구소를 운영하고 있는 대표 성우이기도 합니다. 반갑습니다.
성우로 활동하게 된 계기는 무엇인가요?
어릴 때부터 꿈이었어요. 그런데 어릴 때는 꿈이 여러 개잖아요. 성우도 하고 싶었고, 가수도 하고 싶었고, 선생님이 멋있어 보이면 선생님도 하고 싶다가, 또 병원 가서 간호사 선생님들이 멋있으면 간호사가 되고 싶고…. 그렇게 여러 가지 꿈을 꾸다가 고등학교 때 방송반 활동을 하면서 구체적으로 성우를 꿈꾸게 됐죠. 그래서 서울예대에 입학하게 됐고, 자연스럽게 성우가 됐어요.
성우로서 가장 기억에 남는 작품이나 캐릭터는 무엇인가요?
아무래도 <엑스파일>을 10년 동안 하다 보니 극중 스컬리라는 인물에 애정이 가요. 스컬리가 정말 멋있는 여자거든요. 또 <롤러코스터-남녀탐구생활> 같은 경우는 대중들한테 엄청난 사랑을 받았으니 잊을 수가 없죠. <생로병사의 비밀>도 15년을 했어요. 그리고 파리 루브르 박물관 오디오 가이드의 한국말 작품해설도 제 목소리랍니다. 대만국립박물관 오디오 가이드도 했고요. 애니메이션은 <이누아샤>의 금강, <쿠키런>의 미스틱플라워 쿠키도 했죠. 목소리로 40년 이상을 살다 보니까 딱 한두 작품만 꼽기는 어려운 것 같아요.
목소리 연기를 위해 특별히 연습하거나 관리하는 방법이 있다면 알려주세요.
처음에 시작하는 분들이라면 정확한 발음이 가장 중요해요. 정확한 발음으로 낭독을 꾸준히 하다 보면 발성은 자연스럽게 좋아지거든요. 그래서 정확한 발음으로 낭독을 꾸준히 하는 것을 권해요. 그러면 시간이 모든 것을 해결해 주죠.
저는 목소리가 커서 지적받는 일이 가끔 있는데, 연습을 하면 이런 것도 달라질 수 있나요?
그럼요. 낭독을 꾸준히 하다 보면 자기만의 안정된 톤이 만들어져요. 자연스럽게 자기도 편하고 듣는 사람도 편한 톤이 만들어지죠.
성우들은 캐릭터마다 다른 목소리를 내는데, 선생님은 목소리를 몇 가지나 갖고 계신가요?
성우들을 ‘천의 목소리’라고 그러잖아요. 몇 가지라고 단정 지을 수가 없어요. 우리는 연기자이기 때문에 새로운 캐릭터를 만날 때마다 내가 없어지고 그 인물 속으로 쑥 들어가거든요. 이런 걸 메소드 연기 기법이라고 해요.

인터뷰 중인 서혜정 성우와 필자. ©김익환
성우 일을 하면서 가장 힘들었던 순간은 언제였나요?
캐릭터를 만들어 내는 일도 그렇고, 사람들과의 관계에서도 힘든 일이 있었겠죠? 그런데 지금 생각해 보면 단 한 번도 힘들었던 적이 없는 것 같아요. 왜냐하면 내가 그 일을 너무나 좋아하고 사랑하기 때문에 다른 모든 불편한 것들이 불편하게 느껴지지 않는 거죠. 다 감내할 수 있었고 그것마저도 기분 좋게, 행복하게 받아들일 수 있었던 거죠.
처음 성우 일을 시작했을 때와 지금을 비교했을 때 가장 달라진 점은 무엇인가요?
처음에는 많이 긴장했죠. 잘하려는 욕심 때문이었겠죠? 지금은 긴장하지 않고, 잘하고 싶은 욕심도 없고 그냥 하는 거예요. 그냥 즐겁게 행복하게 즐기는 거죠. 그게 가장 큰 차이인 것 같아요.
성우가 되기 위해 꼭 갖추어야 할 자질이나 능력은 무엇이라고 생각하시나요?
축구 선수가 되려면 달리기는 기본이잖아요. 그렇듯이 성우가 되려면 발음은 기본이에요. 발음을 정확하게 하는 훈련만 되면 그다음부터는 하나씩 배워가면서 만들어갈 수 있죠. 축구 선수가 달리기가 안 되면 패스를 아무리 잘해도 소용없고 슛을 아무리 잘 쏴도 소용없잖아요. 그렇듯이 성우에게 있어서는 발음이 가장 중요하다고 할 수 있죠.
실제로 캐릭터에 감정이입이 많이 되시나요? 연기와 감정을 어떻게 조절하시나요?
다양한 체험을 하는 것이 도움이 돼요. 모든 일을 내가 직접 다 체험할 수는 없기 때문에 드라마나 영화를 본다든가 소설을 읽는다든가 하는 경험이 매우 중요하죠. 책속에는 무한한 세상이 있잖아요. 그래서 그런 간접 경험들을 많이 해서 경험을 쌓으면 도움이 돼요. 그래야 내가 어떤 캐릭터를 만났을 때 이 캐릭터는 어떤 책에서 봤던 그 인물과 비슷하다. 그래서 그때 느꼈던 그 감성을 이끌어내서 표현을 하는 거죠.
낭독연구소를 운영하고 계시다고 들었습니다. 낭독은 어떤 것인가요? 소리 내서 책을 읽는 것과 다른가요?
의미적으로는 똑같아요. 낭독의 사전적인 의미는 ‘글을 소리 내어 읽는 것’이에요. 그런데 제가 하는 낭독은 단순히 목소리를 내어서 글을 읽는 것과 약간 달라요. 낭독은 희곡을 읽을 때 많이 활용되어져요. 대사거든요. 대사는 말이잖아요. 그러니까 낭독이라는 건 우리가 글을 보고 말을 한다고 생각하면 돼요. 그냥 평면적인 글자 하나하나를 읽는 것이 아니라 그 글 속에 있는 뜻을 헤아려서 내가 이야기를 해준다고 생각하면 돼요.

어르신들과 낭독 수업 중인 서혜정 성우. ©김익환
어르신들이나 장애인과 함께 낭독 수업도 진행하고 있다고 들었습니다. 어떻게 하는 것인지, 어떤 효과를 얻을 수 있는지 궁금합니다.
오늘 수업도 보셨겠지만 어르신들은 말할 기회가 별로 없어요. 그래서 말을 안 하다 보니까 혀가 굳어요. 그래서 어눌하게 말하게 되죠. 그런데 낭독을 꾸준히 하면 혀가 운동이 되기 때문에 혀가 안 굳어요. 그래서 말이 어눌해지지 않죠. 또 낭독을 하다 보면 글의 내용에 집중하기 때문에 생각을 하게 되거든요. 그래서 뇌가 깨어나고 눈빛도 살아나는 거예요. 그래서 얼굴 표정도 화사해지고 예뻐져요.
시각장애인을 위한 목소리 재능기부도 하고 있다고 들었는데, 오디오북 제작에 참여하시는 건가요?
저희는 목소리로 활동을 하다 보니까 시각장애인들을 위한 봉사가 많아요. 많은 성우들이 그런 봉사활동을 하고 있죠. 저도 오래 전부터 시각장애인 센터에 가서 책 읽어주는 봉사를 해오다가 이제는 그 봉사자들을 교육하는 일을 하고 있어요. 오디오북 봉사도 있고, 상품화된 오디오북도 있어요. 성우가 오디오북을 녹음한다는 건 연기자들이 텔레비전에 출연하는 거랑 똑같은 거예요. 종종 발달장애인과 낭독 수업을 하기도 하죠. 언어발달이 지연된 장애인들의 경우, 발음을 교정하는 데 낭독이 큰 도움이 됩니다.
<나에게, 낭독>, <어린왕자> 등 직접 낭독 책도 내셨는데요, 책 소개를 부탁드립니다.
이번에 나온 <서혜정의 낭독, 어린왕자>는 일반 <어린왕자> 책하고 내용은 똑같아요. 그런데 낭독에 입문하는 분들을 위해서 줄바꿈을 해서 편집한 책이에요. 그렇게 때문에 그 책을 소리 내어 읽으면 낭독이 저절로 완성돼요. 이렇게 편집된 책 한 권을 다 낭독하고 나면 일반 책을 읽을 때도 자연스럽게 끊어 읽는 지점을 찾을 수 있게 되죠. 처음 낭독을 해보는 분들에게 도움이 될 거예요.
따로 배우지 않아도 집에서 혼자 낭독을 해볼 수도 있을까요?
혼자 연습하는 것도 가능하죠. 그 대신 모니터를 많이 해야 돼요. 읽기만 해서는 내 발음이 맞는지 틀린지 잘 모르니까. 그래서 프로 성우들이 한 걸 잘 듣고 모니터하면서 스스로 연습하면 점점 늘게 되죠.
이 일을 하시면서 갖고 있는 목표는 무엇인가요?
개인적인 성장은 어느 정도 되었다고 생각해요. 이제는 경력도 있고, 나이도 있고 하니 우리 사회에서 어른으로서의 삶을 살아야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많이 해요. 그래서 다양한 봉사 활동을 하고 있어요. 다른 사람들과 더불어 사는 삶을 만들어가고 싶어요.
일을 할 때 지키기 위해 노력하는 나와의 약속은 무엇인가요?
사람과의 약속을 잘 지켜야 돼요. 그리고 항상 나보다 먼저 상대방을 배려하는 마음이 중요해요. 제가 살아보니까 누군가를 배려하는 것은 내 것을 주는 게 아니라 그렇게 함으로 인해서 나한테 돌아오는 몫이 더 크더라고요.
선생님의 인생 좌우명이나 마음속에 남아 있는 문장/명대사는 무엇인가요?
<어린왕자>에서 여우가 그런 말을 해요. “가장 중요한 것은 눈에 보이지 않아.” 많은 사람들이 눈에 보이는 것에만 가치를 두고 사는데, 눈에 보이지 않는 것에 대한 가치가 굉장히 큰 것 같아요. 공기도, 목소리도, 사랑도 눈에 보이지 않잖아요. 그런데 우리는 그런 것들이 없으면 살아갈 수가 없죠. 그렇게 눈에 보이지 않는 것에 대한 가치를 두는 삶을 살고 싶어요.
성우를 꿈꾸는 사람들에게 해주고 싶은 조언이 있다면요?
성우는 목소리 배우예요. 배우는 소울을 가지고 작업하는 사람들이거든요. 그래서 자기의 영혼을 매일 갈고닦아야 돼요. 물론 테크닉적으로 발음을 배우고 발성을 배우고 연기를 배우는 것도 중요하지만 진짜 핵심은 내 마음을 갈고닦는 데 있어요. 흔히 눈을 ‘마음의 창’이라고 하는데, 목소리는 ‘영혼의 울림’이거든요. 내 영혼의 울림이 누군가에게 전해졌을 때 좋은 느낌을 주고, 그 사람이 내 목소리를 듣고 힐링이 되고 마음이 따뜻해지기 위해서는 내가 그런 사람이 돼야 되거든요.
근데 우리가 인간이기 때문에 나름대로 마음을 닦는다고 해도 수시로 욕심이 들어오고 부정적인 생각이 들어오고 미움이 들어오고 그러잖아요. 그럴 때마다 명상도 하고 기도도 하면서 그런 생각을 떨쳐내야 돼요. 그래야 아름다운 목소리를 계속 유지할 수가 있거든요. 그래서 제가 항상 “아름다운 목소리는 아름다운 세상을 만듭니다”라고 얘기하거든요. 목소리가 아름다워진다는 건 사람이 아름다워진다는 거거든요. 그런 아름다운 사람들이 모여서 사는 세상은 아름다울 수밖에 없잖아요. 그래서 성우를 꿈꾸는 친구들한테 해주고 싶은 얘기예요.
40년 동안 목소리 하나만으로 희로애락을 표현하며, 듣는 이의 마음을 움직여 온 성우 서혜정. 끊임없는 노력과 연기에 대한 열정으로 수많은 캐릭터에 자신만의 색깔을 입히며 대중의 뇌리에 깊이 각인되었다. ‘목소리는 영혼의 울림’이라 말하는 그녀. 그녀만의 따뜻하고 진솔한 목소리를 통해 성우의 세계에 새롭게 다가갈 수 있는 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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