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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이라는 이 친구. 함께하면서도 참 여러 생각 드는 복잡함 그 자체일 때가 많다.  © pixabay

정신과와의 첫 만남, 정신과 약과의 첫 만남.

많은 정신(사회심리)장애인들에게 생애 첫 정신과 방문날은 곧 첫 약 처방을 받게 되는 날도 되고는 한다. 정신과 약과의 첫 만남. 열아홉 살 적의 필자 역시 마찬가지였다. 한마디로 정신장애인으로서의 삶에서 약이라는 건, 일찍이 붙여지는 낯선 파트너인 것이다.

자신과 함께하게 된 정신과 약에 대한 감정과 감상은 모두에게 각양각색일 것이다. 처음은 쉽사리 납득되지 않지만 이내 자기 자신의 일부로, 정체성으로 받아들이는 다소 진부한 서사처럼, 한 사람에게도 늘 고정된 게 아니라 시간의 흐름에 따라 여러 방향으로 변화하기도 한다.

여기에 이어 처음 정신과를 다니기 시작해 이제 하나씩 정보를 찾아보고 알아가는 이들부터, 장기간 증상 상태가 고착화되어 장애 정체성을 형성하는 이들에게까지. 자신의 약에 대한 감정은 상당히 넓은 스펙트럼에 걸쳐 다양한 형태로 형성되는 것이다.

과연 이 많은 사람들의 표현대로 약은 화학적 통제 내지는 구속인가? 아니면 잠시 아픔을 완화하는 '제정신 구독권'인가? 어쩌면 둘은 딱히 상반되지 않는, 증상 없는 '제정신'으로의 획일화를 핵심으로 하는 정상성중심주의적 구속이란 말도 되지 않을까? 약은 나의 '친구'일까?

여기까지 사색이 이르고 나니, 정신장애인이 약 복용 생활에 있어서 받게 되는 모순되었지만 일관적인 압박을 살펴보는 것이 정신장애인과 신경다양인의 해방을 말하는 것에 있어 필수적이겠다는 결론이 나오게 되었다.

정신장애인의 '약 먹는 인생'은 꼭 눈치게임을 떠오르게 한다

소제목이 말하는 바는 다름 아닌, 정신장애인은 약을 꼭 먹어야 하는 존재면서 동시에 약 먹는 사람이라면 안 된다는 모순적으로 일관된 메시지이다. '약 먹었니?'에 담긴 뉘앙스와 같이, 근본적으로 우리 사회에서 '정상'이 되지 못한 정신장애인은 타자화되며, 자신의 삶이 보장되어야 하는 시민의 자리에서 논해질 권한을 얻기마저 힘겹다.

대신 사회의 안전에 불안요소가 되는 존재로 여겨져 차별받아 낙인이 찍히고 객체화된다. 그 결과, 궁여지책으로 '약 먹으면 비장애인보다도 사회에 무해한 정신장애인'을 어필하고 이걸 정상 시민들'께서 받아 주시길' 호소해야 하는 처참한 전개까지 나온 채 많은 정신장애인들이 속 타는 심정으로 각자의 자리에서 삶을 살아내고 있었다. 

그럼에도, 이제는 더 나은 권리의 주체로서 당당한 삶을 위해 그간 외쳐오고, 또 외치는 정신적 장애 당사자 활동가들의 분투와 선전이 이어진다는 점이 작지 않은 위안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투쟁과 약, 연대를 위해 우리는 어떻게 무엇을 지켜보아야 하는가

한편, 또 나아가 살펴볼 지점은 정신과 약을 먹는 이마다도 약에 대한 입장과 위치가 온전히 같을 수는 없다는 사실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특히 정신장애인의 약 복용에 대해선 앞서 말한 것처럼 사회의 이중적이고 상호 모순적인 압박이 이미 존재하고 있다.

가령, 인권의 관점에서 정신장애인에게 필요한 것은 화학적 약물이나 입원 이전에 사회구조적인 차별의 철폐일 것임을 주장할 수 있다. 이러한 정신장애인 활동가들의 날카로운 문제 제기와 지적은 분명 유효하고 시의적절하며 또 현실을 직시한 외침이다.

그러나 정신과 약물은 분명 어떤 당사자에게는 당장의 삶의 질과 직장생활을 이어가기 위해 필요하다. 이런 경우 해당 당사자는 직장에선 또 약 복용을 숨겨야 하는 이중고를 겪는 경우도 흔하다. 또 어떤 이에게는 신체화증상으로부터 최소한의 자기 보호를 위해 필요할 수도 있다. 이러한 면모들을 가진 정신과 약이 정상성 중심적인 사회에서 권장하고 드러낼 만한 것으로 인정받고 있냐면 결코 그렇다고는 볼 수 없다.

극단적인 경우로는, 정신과 약에 대한 기성세대의 편견으로 인해 부모로부터 약을 강제 압수당하고 주거를 위협당하기까지 하는 위기청소년들이 긴급히 도움과 지원을 호소하는 경우도 X(구 트위터) 등의 사회관계망서비스(SNS)에서 잊을 만 하면 찾아볼 수 있을 정도이다.

이들은 처절함을 알리며 살얼음판을 걷기보단 병원에 통원하고 처방받은 약을 복용하며 무난한 일상을 살아가고 싶었을 것이다. 우리는 이런 당사자들의 삶에 연대를 해야 할 텐데, 어떻게 연대할 수 있을까?

같은 진단이라도 똑같이만 살아가는 사람 없는데, 그럼에도 공감을 찾는 이유

정신과 약에 대한 사회적 맥락이 이럴진대, 정신장애인 당사자들에게 약에 대한 인식 문제를 한 방향으로만 다루고 투쟁해야 할 '교묘한 의무'가 주어진다면 그것은 기만이나 다를 바 없을 것이다. 이 주제를 'vs놀이'마냥 '치료 vs 투쟁'으로 당사자끼리의 진영 나누기, 감정 소모성 대립이 필요하다고 오판하지 않는 것이 정신적 장애에 대한 당사자 공부의 시작점이 될 것이다.

앞서 비슷하게 언급했듯 같은 진단이라도 똑같이만 살아가는 이는 없다는 건 명백한 사실이고, 공감의 함정이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나는 이 주제가 당사자의 주도적 결정권이 중요시되는 단면이라는 지점. 그곳을 유의미하게 가리킬 수 있다고 말하고 싶다. 이어, 당사자가 다른 당사자의 맥락을 더욱 헤아려 알고자 하며 공감하려 하는 인권 감수성은 여전히 유효하게 소중한 것임을 말하고 싶다.

글을 마치며, 정신과 약이 정신질환 내지는 정신장애에만 한정되어 사용된다는 것마저도 이미 고정관념임을 말하고 싶다. 상표가 등록된 약 이름을 직접 밝힐 수는 없겠으나, 항정신병제가 발달장애인의 '도전적 행동'에 처방되기도 한다는 점에서 '화학적 구속'이라는 비유에 꼭 맞게 되기도 하고, 비장애인에게도 '면접 긴장 완화약'으로 흔히 알려진 그 약이 심장내과에서의 빈맥 완화 처방에 이어 정신과에서 안정제로 아주 널리 처방되는 그 약이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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