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4년 9월 19일 ‘도대체 움직일 수 있는 공간을 만들어주지 않는 서울의 거리는 저의 마지막 발버둥조차 꺽어놓았습니다. 시내 어느곳을 다녀도 그놈의 턱과 부딪혀 씨름을 해야합니다.(고 김순석 열사의 유서 일부분)’ 지체장애를 가지고 있던 34세의 청년 김순석은 이렇게 ’서울거리의 턱을 없애달라‘는 유서를 남긴 채 자신의 지하셋방에서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그리고 이제 처음 이동권과 접근권을 외치던 그의 죽음 이후 어느덧 40년이라는 시간이 흘렀다.
그 사이 서울에는 123층짜리 초고층 건물이 지어지고, 24시간 영업으로 시간과 상관없이 필요한 물건을 구입할 수 있는 편의점 수는 올해 이미 5만개를 넘어섰다. 그리고 1인당 커피소비량이 500잔에 이르는 대한민국의 전국 5대 주요커피전문점 매장 수 역시 1만2천개가 넘어가고 있다. 하지만, 늘어가는 시설물의 수만큼 장애인이 이용할 수 없는 공간의 수도 함께 늘어나기만 할 뿐 새로 만들어지는 공간들은 대한민국 국민인 장애인의 접근을 여전히 허용하지 않는 장애인 접근불가 시설이 되고 있다.
장애인의 접근권을 보장하기 위해 만들어진 「장애인.노인.임산부 등의 편의증진 보장에 관한 법률」(약칭 : 장애인등편의법)이 처음 시행된 지 올해로 27년이 되었다. 그리고 「장애인차별금지 및 권리구제 등에 관한 법률」(약칭 : 장애인차별금지법) 역시 시행된 지 올해로 16년이 되었다. 이처럼 장애인의 접근권이 차별받지 않도록 하기위해 우리는 법을 만들었고 그 법들 역시 긴 시간을 보냈지만, 여전히 장애인은 원하는 곳에서 밥 한끼 차 한잔을 제대로 마시기 어려운 현실앞에 있다.
고 김순석 열사의 외침 이후 우리는 매일같이 기본적인 이동과 접근조차 보장되지 않는 현실에 대하여, 가장 큰 책임과 의무를 가지고 있는 국가 및 지방자치단체에 기본적인 평등권을 보장하라고 외치고 있다. 하지만, 우리의 외침에 뒷짐을 진채 그들은 사업주들과 건물주들의 경제적 어려움을 이야기하며 장애인의 불편함은 그냥 참고 견디라는 무책임한 이야기만 반복하고 있다.
이에 2018년 장애인차별금지추진연대 등 장애인단체들은 1층조차 들어갈 수 없는 휠체어 사용 장애인의 보장되지 않는 권리에 대하여 소송을 제기하고 법원의 판단을 받아보기로 하였다. 장애인의 평등권을 보장하기 위해 만들어진 장애인차별금지법을 중심으로 장애인의 접근권을 제대로 보장하지 못하는 장애인등편의법의 문제에 대하여 국가 및 관련사업체에 책임을 묻기로 하였다.
그렇게 시작된 소송은 1심에서 일부업체와는 편의시설을 설치하기로 조정하는 것으로, 끝까지 소송을 진행했던 편의점 업체는 패소 이후 더 이상 항소하지 않고 편의시설을 설치하기로 결정하면서 결국 장애인의 접근권에 대한 의미있는 판결을 남겼다.
하지만, 이 소송 과정에서 결국 1심 2심 법원은 피고인 대한민국의 책임을 묻지않았다. 장애인의 접근권과 관련해 가장 큰 의무를 가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장애인의 권리를 외면한 채 차별상황을 묵인하고 오히려 잘못된 법체계와 시행령으로 장애인의 차별을 가중시키고 있는 국가에 우리는 손해배상을 요구하였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우리는 이제 대법원에 마지막 결정을 받아보기로 했다. 그리고 대법원은 국가의 접근권 보장 의무에 대하여 장애인에 대한 손해배상 책임을 이야기하는 공개변론을 진행하기로 하였다. 재판없이 법적인 판단만을 주로 하는 대법원의 공개변론 결정은 매우 드문 일이다.
장애인의 접근권과 관련하여 우리는 이제 대법원의 대법관들에게 직접 보장되지 않는 우리의 권리에 대하여 이야기할 것이다. 장애인의 접근권에 대하여 기본적인 평등권을 보장하지 않는 국가는 당연히 이에 대한 책임을 져야하며, 국민의 권리를 판단해야하는 법원은 이에 마땅한 판결을 해야한다. (대법원 공개변론 일정 : 2024년 10월 23일 오후2시 대법정)
소송 진행 중 법원은 면적기준과 상관없이 편의시설을 설치해야한다는 판결을 내렸다. 그리고 우리는 이러한 법원의 판결을 반영한 법률 개정을 강력하게 요구하였다.
하지만, 2022년 5월 보건복지부는 장애인등편의법 시행령에 편의시설 설치 의무를 기존 300제곱미터에서 50제곱미터로 변경시행하겠다고 발표했다. 입법예고 당시 장애인단체는 면적을 기준으로 편의시설 설치 의무에 예외를 두고 모든 시설에 의무를 적용하지 않는 것은, 장애인의 접근권을 합법화하는 악법으로 강력하게 면적기준 폐지를 주장하였다.
하지만, 입법예고 과정에서 장애인당사자와 장애인단체 등 수천명이 반대의견을 제출하였지만, 결국 법원의 판결도 무시한채 보건복지부는 사업주의 어려움을 핑계로 시행령 개정을 강행했다. 이에 국가가 법에서조차 면적을 기준으로 장애인이 아예 접근할 수 없는 시설을 만들고, 권리를 보장해야하는 법을 장애인의 권리를 침해하는 법으로 악용하고 있다.
유엔장애인권리협약에서 ’당사국은 장애인이 자립적으로 생활하고 삶의 모든 영역에 완전히 참여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하여, 장애인이 다른 사람과 동등하게 도시 및 농촌지역 모두에서 물리적 환경, 교통, 정보통신 기술 및 체계를 포함한 정보통신, 그리고 대중에게 개방 또는 제공된 기타 시설 및 서비스에 대한 접근을 보장하는 적절한 조치를 취해야 한다.‘라고 규정하고 있다.
또한 유엔장애인권리위원회는 ’시설물 접근권을 규정하고 있는 장애인등편의법에서 규모와 건축시기를 기준으로 일정기준 미만인 공중이용시설에 대해서는 법률을 적용하지 않는 것에 대하여 개선을 권고하였다.
국제적인 기준이나 권고에도 오히려 시행령의 면적기준에 대한 문제를 전혀 고민하지 못하며, 장애인의 의견을 무시한 채 평등권의 기본적인 원칙조차 이해하지 못하는 국가에 대하여, 우리는 고 김순석 열사의 죽음이 헛되지 않도록 이동과 접근의 권리가 보장되는 그날까지 끊임없이 싸우고 외칠 것이다.
세상에 권리를 침해받아도 되는 사람은 없다. 국가는 모든 국민의 평등한 권리를 보장하기 위한 의무와 책임이 있으며, 장애인도 대한민국의 국민이다. 사회는 누구에게나 평등해야하고, 어느 누구도 장애와 같은 다름으로 인해 출입할 수 없는 출입금지 구역이 있어서는 안된다.
국가는 장애인의 평등한 접근 이동의 권리를 보장하라.
2024년 9월 19일
사단법인 장애인차별금지추진연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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