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이블뉴스 장윤경 칼럼니스트】나는 무지한 엄마였다.

그저 ‘발달 장애’는 발달센터라는 곳에서 치료만 받으면 언제고 낫는 병인 줄만 알았다. 그리고 언젠가 다 회복해서 이곳을 탈출(?)하리라는 굳은 믿음에 한 달에 명품 가방 한 개 정도의 비용을 가볍게 발달센터에 카드값으로 지출하면서도 정작 나를 위한 옷과 화장품 사는 것에는 세상 자린고비 겁쟁이가 된 이상한 아줌마(?)로의 시간을 수년간 흘려보냈다.

다른 장애 부모들은 발달센터 대기실을 어떻게 기억하고 있을까?

내게 있어 대기실은 세상의 따가운 시선 속에 잠시라도 내가 쉬고 싶은 휴식처였고, 그곳에서 만난 사람들이 1년에 한두 번 명절에나 만나는 친척보다 더 자주 보는 제2의 가족이었다. 이 생활도 5~6년간 습관이 되자 대기실은 곧, ‘별다방’이요 브런치카페 같은 쉼표의 공간으로 추억되었다.

서울문화재단 전시 프로젝트가 끝난 후, 아들은 화가 선생님과 멘토링을 더 이어가고 싶었지만, 선생님의 대학 강의일정으로 그 만남은 계속 유지 되기 어려웠다. 그 후로 동네 미술학원을  찾아도 봤지만 장애아동이라는 이유로 거부당하기 일쑤였다.

누가 ‘무식하면 용감하다’ 했던가? 설령 그렇다고 미술에 무지(?) 좀 하면 또 어떠한가? 누구에게나 처음이 있듯이, 그래서 나는 결심했다. 내가 아들의 미술 치료사이자 매니저가 되기로.

그 후로 아들과 홍익대 주변 화방을 놀이터 삼아 방문하기 시작했고 자연스레 화방 사장님께 다양한 미술 재료에 관해 설명도 듣고 구경도 하며 미대생들이 무엇을 좋아하는지부터 살피기 시작했다. 덕분에 예준이는 생일 선물로 고른 나무 색연필을 거부감 없이 받아들이기 시작했다. 홍대거리에서 돌아오는 길에는 아들이 좋아하는 입 간판, 미용실에서 본 잡지, 대학가 주변 포스터를 사진으로 찍고 예준이가 일기를 쓰는 습관이 자리 잡을 때쯤, 예쁜 글씨체와 필압 조절은 아들에게 선물처럼 따라왔다.

나는 미술에는 무지했지만, 점차 장애아동 치료는 치료사를 만나야만 할 수 있는 것이 아님을 시간 흐름 속에 깨달아 갔다.

첫 단체 전시 이후, 나도 예준이의 시각추구인 색연필 흔들기 상동 행동을 아들과 함께 따라 해보고 싶어졌다. 이제는 내가 치료사에게 배운 조언 한 마디를 붙잡고 내 자식에게 맞는 프로젝트를 엄마표로 만들어 생활 속에 실천하지 않으면 치료의 마법은 절대 일어나지 않는다는 걸 말이다.

우리 부부가 미술 전공자가 아니었기에 무엇을 어떻게 이끌어 줘야 할지 몰랐지만, 내가 처음 국문학 전공을 선택할 때를 떠올려보았다. 세상 속 사물을 관찰하고 그 사물에 말 걸기, 작가의 작품을 원고지에 필사해보며 시인을 꿈꾸던 그 맛을, 미술이라는 새로운 예술 장르에도 응용하고 예준이에게도 접목해보기로 했다.

시간이 흐를수록 마음을 그리는 화가가 되겠다는 아들의 말 덕분에 주말이면 미술관 전시회 관람이 가족의 일상이 되어갔다. 언제부턴가 우리 부부도 온통 미술에 관한 자료만 눈에 들어왔고 아들은 그것을 사진에 담아 따라 그려보고 색연필로 겹칠 하는 날들이 늘어났다.

색칠 북을 사주어도 기존의 견본 색을 결코 따라 칠하지 않았고 자신만의 색을 만들어가는가 하면 밑그림의 경계선을 넘어가며 온몸으로 눌러 칠했다. 연필을 똑바로 잡지 않고 움켜잡듯 색연필을 양손으로 쥐고 흔들어도 나는 아들을 응원했다. 그리고 점차 벽에 전지를 붙여주고 그림의 범위를 넓혀갔다. 그러던 어느 날 부 터는 저렴한 스케치북도 묶음으로 사준 뒤 외부로 이동할 때마다 가방에 언제든 들고 다니며 작업 한 습작품들을 사진과 동영상으로 보관하려 노력했다. 그렇게 나만의 보물이 차곡차곡 나이테를 만들어갔다.

정리를 좋아하는 남편은 아이의 습작품이 쌓이고 벽에 두서없이 전시되면 한 달 뒤 아이 몰래 한 번에 분리 수거통에 조용히 버리자고 나를 설득했지만, 지독하게 버리는 것을 싫어하는 나는 심지어 물티슈에 그린 아들의 습작품까지 이삿짐 꾸릴 때마다 보물 1순위로 챙기기 시작했다.

779dde91faeb233d145f58170fc99988_1748567878_3413.jpg

환경 다큐를 보고난 뒤 고래와 물고기를 그리는 예준이의 모습  -©장윤경

예준이 엄마로 불리기 전 시절, 19살 소녀 장윤경도 처음 나를 문학소녀로 만들어준 펜팔친구와 주고받았던 편지를 지금도 보관해 추억하는 것처럼, 아들의 첫사랑 같은 미술과 만남을 내가 보관해 주고 싶었다. 어쩌면 내가 없을 세상이 왔을 때 예준이가 어린 시절 미술놀이 속에 엄마와 함께했던 추억을 기억해 주길 바랐는지도 모르겠다.

지금 이 순간 잠시 쉼표를 찍으며 예준이를 떠올려본다.

내 아들 예준이! 이 작은 천사는 내게 선물처럼 찾아와 매 순간 나를 가르친 삶의 스승이었다. 돈과 명예보다 우리 삶에 더 중요한 보물이 있다는 걸 알려주는 천사였다.

생각해보면 아들의 장애 덕분에 특수학급이 있는 어린이집이며 학교와 치료실을 찾다 보니 이삿짐 꾸리며 언제든 미련 없이 떠날 수 있는 유목민의 정신을 배웠고, 다양한 분야의 의사도 만날 기회의 수를 선물해 주는가 하면 참된 의사를 보는 지혜의 눈도 가르쳐 주었다.

그렇게 아들 덕분에 각 분야의 의사들을 만날 때마다 나는 매번 아이의 장애를 조심스레 밝혀가며 약 처방 시 혹시 모를 문제를 위해 참고해 달라 작은 고해성사를 그들에게 해야만 했다.

아이의 낙상사고로 찾은 정형외과 의사는 엄마가 결혼이 늦어 이런 아이를 낳은 거라며 아들 장애의 원인으로 내 나이를 탓했고, 예준이 5세 무렵 만난 치과의사는 자폐성 장애아이는 무조건 마취를 시키고 혹시라도 거부하면 고정대 벨트로 묶고, 그조차 거부하면 돌려보내라며 보호자의 동의 없이 상세병명란에 F코드를 기록 하는 의사도 있었다.

아이의 입천장소리 발음이 어눌해 찾은 대학병원 이비인후과 교수는 자폐 아이는 조절이 힘드니 무조건 마취 후 엑스레이부터 찍고, 설소대를 수술해도 장애가 있으면 발음이 크게 변화 없을 수도 있다고 거침없이 내게 말했다. 그때마다 장애아이를 낳은 것이 죄인처럼 느껴져 아이를 등에 업은 채 병원 비상구 계단에서 혹은 집으로 돌아오는 차 안에서 소리 없이 울고 있는 나는 그야말로 주홍글씨가 가슴에 새겨진 여인이었다.

그런데 5살 무렵 처음 방문했던 한 개인병원 소아청소년과 의사 선생님은 달랐다. 소아청소년과 대기자가 꼬리에 꼬리를 물고 있는데도 늘 내 이야기를 먼저 들어주셨고 아이가 장애판정을 받는 과정부터 그 이후에도 부모에게 위로와 응원의 말씀을 주신 뒤, 천천히 아이를 진찰하시며 아이에게 심지어 악수까지 청하시는 게 아닌가? 그때 알았다. 세상에는 아직도 이런 의사분들도 계시다는 것을. 한번은 폐렴으로 대학병원에 불가피하게 입원을 하는 순간에도 걱정하시며 전화를 주시는 연세 365 소아청소년과 한동기 원장님과의 인연이 그렇게 시작됐다. 그뿐이 아니었다.

폐렴으로 대학병원에 입원해서도  예준이는 그림을 그리고 색칠하기 시작했다. -자료출처: 장윤경 개인소장
폐렴으로 대학병원에 입원해서도  예준이는 그림을 그리고 색칠하기 시작했다. -자료출처: 장윤경 개인소장

언어 치료사이자 센터장이신 선생님 한 분이 예준이가 색연필에 집중하는 모습을 보시고 '어머니 예준이 미술에 소질 있는 것 같아요.'라고 용기를 주는 치료사 원장님도 계셨다. 그저 언어 치료사에게 보내면 마법이 이어날 것이라는 생각에 습관처럼 다니는 치료실이 많아졌을 무렵, 나는 그 언어 치료사 원장님의 말씀을 기억하고 붙잡았다.

아들과의 삶 안에서 만난 사람들, 그들 안에서 ‘그래, 널 응원하고 기도 중에 기억할게’라고 말씀해주시는 그 용기의 메시지 한 마디가 아들과 나를 살게 했고 움직이게 했다. 그렇게 내가 아들과 열심히 살고 싶어 웃기 시작하자, 신기하게도 예준이도 웃는 날들이 많아졌다.

나는 지금도 후배 엄마들에게 조심스레 말한다. 내 장애 자녀와 살면서 만난 모든 사물과 사람이 곧 스승이니 그 어떤 것도 두려워 말고 부딪히고 배워야 한다고. 우리는 사회 속에 마치 숨은그림찾기처럼 꼭꼭 아이를 숨겨둘 것이 아니라 그 안에서 더불어 살아갈 방법을 간구하고 가르쳐야 한다고 말이다.

분명 정글처럼 보이는 이 사회이지만, 그 안에도 분명 우리를 응원하고 함께하려는 따뜻한 손길의 ‘수호천사’들은 곳곳에 보석처럼 숨어있다. 신께서 이 땅에 그런 분들을 분명 보내셨고 우리 장애 부모들을 살아갈 수 있도록 하셨기에 눈을 크게 뜨고 용기 내어 말해야 한다. ‘우리 아이의 장애는 틀린 것이 아니라 다른 것일 뿐이며 특별한 아이입니다!’라고 말이다.

‘하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돕는다’라는 말처럼 우리 부모들의 소리를 듣고 수호천사들이 오늘도 우리 곁에 출동할 것이라 나는 믿는다. ‘응답하라! 수호천사들이여!’

-장애인 곁을 든든하게 지켜주는 대안언론 에이블뉴스(ablenews.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