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이블뉴스 장윤경 칼럼니스트】전화벨이 울렸다.
“예준이 어머니, 저 복지재단 미술 강사인데 통화 괜찮으세요? 다름이 아니라, 혹시 예준이 멸종위기 동물 그려본 적 있나요?”
“네? 선생님, 갑자기 그게 무슨 말씀이시죠?”
“아, 실은 이번에 화장품회사 한곳이 주최하는 멸종위기 동물 공모전에 제가 지도하는 장애 학생들 모두 도전해보기로 했거든요. 선정된 작가는 오티즘 엑스포 전시와 화장품회사가 주최하는 협업 전시 기회도 주어져요. 그런데 미리 말씀드리지만, 심사는 미술 전문가분들과 주최 측이 하는 거라 예준이 그림이 선정된다는 장담은 못 드려요. 그래도 참여 의사가 있으신지 여쭤보려고 연락드렸어요.”
“아, 정말요? 기회 주시는 데 당연히 예준이도 도전해야죠, 감사해요. 선생님!”
“그러면 예준이도 참여하는 거로 체크 할게요. 어머니, 공모전은 두 달 뒤가 마감이고요. 지금, 코로나로 대면이 어려우니 중간 작업과정을 사진 촬영하셔서 보내주시면 제가 전화나 문자로 피드백할 예정입니다.”
갑작스러운 복지재단 미술 강사 전화에 아들의 참여 의사는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내 욕심이 먼저 답하고 있었다.
‘맙소사! 내가 미쳤구나.’
예준이는 그간 동물을 단 한 번도 그려본 적 없고, 8절지 이상의 그림은 더더욱 그려본 바도 없었다. 10여 분 멍하니 앉아 현실적 문제를 하나둘씩 떠올렸을 땐, 이미 전화를 끊은 뒤였다.
‘그래, 어떻게든 되겠지, 괜찮아, 피할 수 없다면 즐기면 되는 거야!’
공모전 참여를 번복할 용기는 더더욱 없었던 나는 스스로 긍정 마인드를 외치기 시작했다.
“예준아, 멸종위기 공모전 한다는데, 너도 한번 해보면 어때?”
하굣길, 아들의 눈치를 살피며 슬그머니 공모전 이야기를 꺼냈을 때, 다행히 호기심 가득한 눈빛으로 반기는 게 아닌가?
그 날부터였다.
아들의 확답 한마디를 붙잡고 우리 모자는 공모전을 위한, 멸종위기 동물 전시회부터 동물에 관한 책, 다큐멘터리까지 찾아보며 그야말로 멸종위기 동물 완전정복 프로젝트가 시작됐다. 온통 머릿속은 멸종위기 동물로 가득 했을 무렵 자연스레 아들과 대학가 근처 화방을 찾았다.
“예준아, 흰색 종이 말고 이런 데 그려보는 건 어때?”
“고객님, 보통 색연필 화는 크라프트지를 사용하지 않아요, 더군다나 초등학생이 색연필로 작업 한다면 색이 쉽사리 올라가질 않아 더더욱 어려울 텐데 괜찮으세요?”
아들에게 내가 누런빛의 크라프트지를 내밀자 화방직원이 슬쩍 다가와 미술에 무지한 나를 설득하기 시작했다.
“엄마, 나 이거로 할래요!”
“그래, 시작이 반이라고, 사장님! 그냥 주세요. 뭐 어때요? 이참에 새로운데도 시도해보는 거죠.”
막상 집에 돌아와 4절지 두 장의 종이를 보고 있자니 그 넓이에 압도되고 그야말로 막막해지는 게 아닌가? 무식하면 용감하다 했다고 나는 크라프트지 뒤에 종이테이프를 붙인 뒤 반으로 접어 작업을 편히 할 수 있도록 아들을 독려했다. 그렇게 멸종위기 동물 그림은 생전 처음 보는 커다란 크라프트지에 시작됐다. 그때까지만 해도 이 종이가 가져다줄 뒷이야기가 생길 줄 꿈에도 몰랐다.
예준이가 얼마나 그렸을까? 며칠 뒤, 아들의 그림을 바라보는 순간!
‘맙소사! 초록색 오랑우탄이라니? 왜, 얼굴은 초록색이고 털은 동글동글한 거지? 심지어 미술에서 흔히 말하는 원근법, 구도라는 것도 다 무시된 상태였다. 이대로 괜찮을까?’ 불안과 걱정이 밀려왔지만, 약속한 날짜에 맞춰 미술 강사에게 중간작업 사진은 보내야만 했다.

크라프트지에 멸종위기 동물 오랑우탄을 색연필로 작업하는 양예준 작가. ©장윤경
“예준이 어머니, 보내주신 예준이 작업 사진 봤어요. 그런데 종이 색과 오랑우탄이 조금 낯설긴 한데…. 이제 초반 과정이니 다른 종이에도 그려보게 하시고 혹시라도 예준이가 거부하면 아이 의견을 존중해 주세요. 사실 이번 공모전은 성인 작가들이 대거 도전해 경쟁이 좀 치열하지 싶어요. 예준이는 아직 많이 어린이니까 꼭 선정을 목표로 하기보다 부담 없이 즐기는 걸 권해드립니다. 그리고, 어머니! 보통 작품 뒷면에는 종이테이프를 붙여 연결하지 않는다는 점 참고 부탁드립니다.”라는 문자 답변이 왔다.
‘맙소사! 이건 뭐, 제출해도 다 틀려먹었네, 지금이라도 다시 그리자고 아들을 설득해봐? 아니, 미술이 수학도 아닌데 뭔, 정답이 어디 있데? 내 새끼 그림이 뭐가 어때서? 종이가 크니까 뒤에 종이테이프 좀 붙이면 좀 어때? 에라, 모르겠다. 공모전 좀 떨어지면 또 어떠냐! 시작이 반이랬다고 괜찮아 아들! 잘 하고 있어, 너 하고 싶은 대로 다 해! 가뜩이나 요즘 코로나로 외출도 못 하는데 색깔이고 뭐고 네 맘대로 칠하고 싶은 대로해!’
전화를 끊고 나도 모르게 푸념인 듯 아들을 향한 응원을 외쳤지만, 마음 한편에선 이미 공모전 포기를 조용히 외치고 있었다.
이런 내 맘도 모른 채, 예준이의 엉덩이는 매일 3시간씩 흔들림이 없었다.

예준이는 하루에 3시간씩 한달 보름에 걸쳐 멸종위기 동물 오랑우탄 작업을했다.©장윤경
한 달 보름쯤 지났을까?
‘엄마, 완성했어요.’라고 아들이 말하던 바로 그때!
친정엄마와 남편도 그림을 보고도 너무 신기해 그야말로 헛웃음마저 새어 나왔다.
하루 평균 3시간씩 다양한 색연필의 색들이 수없이 중첩되어 지나간 흔적은 윤기가 날 정도로 반짝거리다 못해 번들번들한 게 아닌가? 그림을 보고 있으면서도 너무 신기해 크라프트지를 조명에 비춰보기까지 했다. 수세미와 칫솔, 포크로 긁고 지우개로 지워가며 그 위에 다시 온몸으로 눌러 그린 흔적이 고스란히 담겨있는 세상에 하나뿐인 그림이었다.
누군가에 배운 바 없는데도 예준이는 그 과정을 온몸으로 즐겼고 작품 안에 담겨 내게 선물하고 있는 게 아닌가? 조금은 낯설었지만, 미술에 무지한 내가 보아도 오히려 형식 파괴의 날것 그 자체가 더 멋지게 빛났다.
처음 시작부터 난해하다며 걱정했던 오랑우탄의 초록색은 수많은 색으로 겹쳐지자 오묘한 색이 되어 마치 오랑우탄에게 숨결을 불어넣은 것만 같았다.

양예준 작가의 ' 우리안에서 우리를 바라보는 오랑우탄'. ©장윤경
‘그래, 우리 예준이가 이렇게 색을 겹칠 한데는 다 이유가 있었구나. 그래, 너도 다 계획이 있었구나.’
그 순간, 알 수 없는 눈물이 흘렀다. 욕심을 버리자 하늘은 내게 아들의 재능을 알아보는 눈을 뜨게 하셨다.
그렇게 나는 아들을 통해 미술을 다시 배웠다.
색에 대한 고정관념을 버려야 한다는 것, 장애가 있어도 기다려주면 언어로 다 담지 못한 것을 예술이라는 언어를 통해 세상과 소통하려 한다는 것을….
전화벨이 요란하게 울렸다.
‘예준이 어머니 저 미술 강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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