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이블뉴스 이슬기 기자】장애우권익문제연구소가 지난 19일 서울 여의도 이룸센터 누리홀에서 ‘2025년도 장애인 인권 디딤돌·걸림돌 판결 선정 보고회’를 개최했다.

올해의 수집·분석 대상 판결은 2024년 1월부터 2024년 12월까지 선고된 장애 관련 판결로 총 2989건을 수집해 선별했고 장애⋅인권⋅법률 전문가로 구성된 선정위원 8인이 네 차례 회의를 거쳐 디딤돌 판결 13건, 걸림돌 판결 5건, 주목할 판결 7건 총 25개의 판결을 선정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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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년 7월 27일 당시 이규식 서울장애인차별철폐연대 대표와 박경석 전국장애인차별철폐연대 상임대표가 “장애인 편의시설 설치를 의무화하라”면서 커피숍 턱을 뿅망치로 내리치고 있다.ⓒ에이블뉴스DB

"장애인 접근권 기본권 인정" 국가배상 인정 등 13건 '디딤돌'

먼저 장애인 인권 증진에 긍정적 영향을 미친 '디딤돌 판결'은 총 13건이다. 첫 번째 판결은 장애계에서도 주목했던 '장애인 접근권' 국가배상 인정 판결이다.

휠체어를 타는 지체장애인 등이 소규모 소매점에 편의시설 설치 의무를 면제한 장애인등편의법을 방치한 국가를 상대로 소송을 제기한 결과, 대법원이 이를 인정했다. 대법원은 국가가 14년간 장애인 접근권을 개선하기 위한 행정입법 의무를 불이행해 장애인이 시설을 이용할 수 없었다며 지체장애인 원고들에게 각 10만원의 위자료를 인정했다.

전근배 선정위원(대구장애인차별철폐연대 정책국장)은 "장애인의 접근권을 헌법에서 도출되는 기본권으로 분명히 자리매김하고 행정입법의 장기적 미비가 번복적 권리침해로 이어질 수 있음을 확인했다는 점에서 디딤돌 판결"이라면서 "앞으로 생활권 단위 시설에서의 접근성 기준을 현실화한 계기를 마련했다는 의의를 갖는다"고 의견을 밝혔다.

교정 내 장애인 화장실 편의시설 미설치에 대한 국가 책임을 인정한 판결도 디딤돌로 꼽혔다. 사지마비인 중증장애인 수형자인 원고는 장애인수형자 전담교정시설인 순천교도소로 이감됐으나 화장실 편의시설이 설치되지 않아 3년간 청소도우미 화장실을 이용하는 등 차별을 당했다며 소송을 제기했고, 법원은 이를 정당한 편의 제공을 거부한 차별행위로 판단하고 손해배상 책임을 인정했다.

또한 전국의 장애인수형자 전담교정시설(안양·여주·포항·청주·광주·순천·군산교도소, 충주·통영구치소)을 대상으로 장애인등편의법 시행령에 규정된 기준에 따른 화장실 편의시설을 설치할 것을 명했다. 이에 따라 장애인수형자 전담교정시설들은 판결 선고 후 장애인 화장실 편의시설 설치 공사를 시행했다.

또한 ▲발달장애인에게 선거용 보조기구를 제공하라고 판단한 사건 ▲법원직 공무원 채용 과정에서의 장애인에 대한 정당한 편의 미제공과 면접위원의 차별적 질문에 대해 위법성을 인정한 사건 ▲중증장애인의 탈시설 시에는 동의 여부가 곧 강제퇴소 및 인권침해의 판단 기준이 아니라 정책의 배경과 복지의 수준, 절차의 충분성 등을 복합적으로 판단해야 함을 제시한 사례 ▲주간활동서비스 신청자격을 나이(65세)를 기준으로 제한하는 보건복지부 지침은 위법하다고 판단한 사건 ▲정당한 편의를 제공하지 않고 정신장애인을 직권면직할 경우의 부당성을 인정한 사건 ▲여성에게 한 추행이 자폐성 장애로 인한 강박 행동일 가능성이 있고 전문가의 진단이나 감정 등의 절차 없이 장애인의 지적능력ㆍ판단능력 등에 관해 함부로 판단하지 않도록 강조한 사례 등이 선정됐다.

▲장애인 이동권 보장 시위와 관련한 경찰의 위법한 현행범 체포와 체포 과정에서의 인권침해, 장애인 차별행위에 대한 국가의 손해배상 책임을 인정한 판결 ▲장애인의 자기결정권 및 제반 사정에 비추어 보다 엄격한 기준을 적용해 한정후견을 종료한 사례 ▲정신장애에도 불구하고 국선변호인을 선정하지 아니한 채 피고인에게 불리한 판결을 내린 것이 위법하다 해 원심을 파기하고 환송한 사례 ▲장해급여 청구 시 재진단일을 일률적으로 적용한 근로복지공단 처분을 위법으로 보고, 최초 진단일을 기준으로 판단하도록 한 결정 ▲상가 소유자 및 관리자가 배수구 틈새를 적절히 관리하지 못함으로써 발생한 휠체어 전도 사고에 대해 배상 책임을 인정한 판결 등도 함께 꼽혔다.

주호민 웹툰 작가 아들 학대 혐의를 받던 특수교사가 2심에서 무죄를 선고받았다. ⓒSBS유튜브캡쳐
주호민 웹툰 작가 아들 학대 혐의를 받던 특수교사가 2심에서 무죄를 선고받았다. ⓒSBS유튜브캡쳐

제3자 녹음행위 불법, 사회적 이슈 '주호민 사건' 등 5건 '걸림돌'

장애인 인권 향상에 제동을 건 '걸림돌' 판결은 총 5건이 꼽혔다. 먼저 특수교사가 9세 초등학생인 자폐성 장애학생에게 "버릇이 매우 고약하다." 등의 정서적 학대를 했지만, 제3자의 녹음행위가 불법이라며 증거능력으로 인정되지 않은 판결, 즉 웹툰 작가 주호민 사건이라 불리며 사회적 파문을 일으킨 사건이다.

1심에서는 정서적 학대로 인정해 유죄로 인정했지만, 항소심에서는 피해 아동과 모친이 별개의 인격체이므로 녹음을 증거능력으로 인정하지 않아 최종 무죄를 선고했다.

김효진 선정위원(장애여성네트워크 대표)은 "1심과 2심에서 정반대의 판결이 나온 것은 서이초 교사 사망 사건과 맞물려 부각된 교권침해 여론에 상당한 영향을 받은 것으로 추정된다"면서 "이번 판결이 특수교사의 교권을 옹호하는 과정에서 장애학생에 대한 학대가 정당화돼서는 안 되며 장애학생의 인권을 가장 최전선에서 옹호해 줘야 할 어른은 특수교사라는 점에서 우리 사회가 경각심을 갖는 계기가 되길 바란다"고 선정 이유를 밝혔다. 

또한 국회의원의 장애 비하 발언을 모욕 및 차별로 인정하지 않은 판결도 '걸림돌'에 선정됐다. 국회의원들이 공식 행사에서 '외눈박이', '절름발이', '꿀 먹은 벙어리' 등의 장애 비하 표현을 사용해 장애 당사자들이 모욕감을 겪었다며 법원에 손해배상을 청구했지만, 법원은 적절치 못한 표현이라고 평가하면서도 피해자가 특정되지 않았다며 청구를 기각했다.

이인영 선정위원(한국장애인재활협회 국장)은 "원고들이 직접적인 피해자가 아닐 수 있으나 피고들의 행위가 장애인차별금지법상 차별행위에 해당하지 않다고 판시한 부분은 법의 입법 취지나 법률을 충분히 검토하지 않은 판단으로 보이며, 결과적으로 실효성을 악화시키는 판결"이라면서 "장애인 비하와 혐오표현을 어떻게든 근절시켜 보고자 하는 장애인들의 노력을 무력하게 만들었다"고 지적했다.

그 외에도 ▲사망 당시 정신장애인의 노동능력이 이미 상실된 상태라고 판단한 사건 ▲HIV 감염인의 장애 인정 소송에서 피고적격 논리에 가로막힌 판결 ▲지능지수 70 이하로 평가되었으나 2012년 87로 평가된 적이 있고 과거 학업성취도, 검정고시 통과, 양호한 수검 태도를 고려해 지적장애 등록이 거부된 사례가 '걸림돌' 판결로 선정됐다.

한편 디딤돌이나 걸림돌로 구분하기 어렵지만 장애인 인권과 관련해 많은 고민을 하게 한 '주목할 판결'로는 ▲정신병원에서 격리·강박으로 사망한 망인에 대한 손해배상을 인정한 판결 ▲정신병원에서 적절한 의료 조치를 하지 않은 과실을 공동불법행위로 인정한 결정 ▲압수·수색영장의 집행에 참여하는 주거주에게 장애가 있음에도 장애인차별금지법 제26조 제6항의 적법한 조처하지 않은 채 수집한 증거는 위법수집증거로서 유죄판단의 증거가 될 수 없다고 한 사례 ▲장애인 수용자의 욕창 악화 및 편의 미제공에 국가배상을 일부 인정한 판결 ▲장애인거주시설 사망 사건에서의 차별적 일실수입 산정 관행에 대한 판결 ▲코로나 백신으로 인한 장애 불인정 처분을 취소한 판결 ▲예외조항인 심신상실 등으로 자유로운 의사결정을 할 수 없는 상태를 폭넓게 인정해 자살에 대한 보험금을 지급한 판결 등이 꼽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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