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의 존엄은 언제 가장 분명하게 드러난다고 볼 수 있는가? 그것은 인간이 아마 가장 취약한 상태로 우리 사회 앞에 서 있을 때일 것이다. 그 어떤 도움 없이는 스스로 이동하기 어렵고, 말하기조차 쉽지 않으며, 일상적인 삶의 리듬에서 끊임없이 지체되는 존재 앞에서 사회는 스스로에게 질문을 던지게 된다. 우리는 과연 누구를 기준으로 이 사회를 설계해 왔는가. 뇌성마비인의 삶은 이 질문을 가장 근본적인 방식으로 제기하는 존재론적 증거이며 우리 사회로부터 소외당한 자다.

뇌성마비는 출생 전후의 뇌 손상으로 인해 발생하는 비진행성 중추신경계 장애로, 흔히 운동장애로 설명되지만, 실제 삶의 현장에서 드러나는 영향은 훨씬 복합적이다. 운동 기능의 제약은 인지, 감각, 언어, 정서, 사회적 관계 전반과 얽혀 있으며, 생애 전 과정에 걸쳐 누적되어 있다. 손상 자체는 진행되지 않지만, 비장애인을 기준으로 설계된 환경과 제도는 시간이 지날수록 그 손상을 확대 재생산 외고 있다. 이로써 뇌성마비는 단순한 의학적 진단이 아니라, 사회적 조건 속에서 형성되는 삶의 구조가 된다고 볼 수 있다.

이러한 뇌성마비인의 대표적 특징은 경직, 불수의 운동, 운동실조 등으로 나타나는 운동장애이다. 이는 걷기, 손 사용, 자세 유지, 식사와 발화 등 가장 기본적인 신체 활동을 어렵게 만든다. 그러나 진정한 문제는 신체 그 자체에 있지 않다. 이동이 어렵다는 이유로 공간에서 배제되고, 말이 느리거나 불분명하다는 이유로 판단 능력까지 의심받으며, 타인의 도움이 필요하다는 이유로 자기결정권이 유보되는 순간, 뇌성마비인은 사회적으로 고립되고, 이 고립은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 우리 사회구조의 문제이다.

감각 처리의 어려움과 의사소통의 제약 또한 뇌성마비인의 삶을 깊이 흔들며 고내하게 만든다. 시지각과 청각의 혼란, 촉각 과민이나 둔감은 일상의 자극을 과도한 긴장으로 전환시키고, 언어 표현의 제한은 생각과 의지를 충분히 드러내지 못하게 만든다. 이로 인해 뇌성마비인은 반복적으로 오해받고, 반복적으로 과소평가되며, 침묵 속에 머물도록 강요받는다. 성장기부터 축적된 이러한 경험은 자존감의 손상과 정체성의 혼란으로 이어지고, 성인기에 이르러 우울과 불안, 사회적 위축으로 굳어진다. 그러나 이들의 정신적 고통을 정면으로 다루는 공적 정신건강 서비스는 거의 존재하지 않는다.

아동기에는 재활과 교육이라는 이름으로 일정한 지원이 제공되지만, 성인이 되는 순간 뇌성마비인의 삶은 급격히 공백 속으로 떨어진다. 학교를 떠나는 순간, 보호의 언어는 사라지고 자기책임의 논리가 등장한다. 그러나 이동권도, 고용 접근성도, 의료 접근성도 확보되지 않은 상태에서 자기책임은 또 다른 형태의 방치일 뿐이다. 나이가 들수록 신체는 더 많은 통증과 피로를 요구하지만, 병원은 여전히 접근하기 어렵고, 진료는 단절되며, 돌봄 시간은 부족하다. 이 축적된 결핍은 결국 삶의 의미를 잠식당하고 있다.

성인기 뇌성마비인은 주거, 고용, 의료, 돌봄이라는 삶의 핵심 영역에서 구조적 배제를 경험한다. 현행 제도는 뇌성마비인을 명확한 정책 대상으로 호명하지는 않는다. 「발달장애인 권리보장 및 지원에 관한 법률」은 지적장애와 자폐성장애를 중심으로 설계되어, 발달기에 손상을 입은 뇌성마비인을 주변부로 밀어낸다. 이 법적 공백은 곧 서비스의 공백이 되고, 공백은 개인의 고통으로 전이되고 있다.

특히 뇌성마비인의 성적 권리는 거의 말해지지 않는 영역이다. 성은 여전히 통제의 대상이거나 침묵의 영역으로 남아 있다. 가정과 시설에서 이들의 성적 감정은 억제되거나 무시되고, 여성 뇌성마비인은 성폭력의 위험에 더 크게 노출되지만 보호 체계는 취약하다. 성에 대한 교육, 상담, 관계 형성의 권리는 인간으로서의 기본 권리임에도 불구하고, 제도는 이를 외면해 왔다. 일부 국가가 중증장애인의 성적 자기결정권을 공공의 책임으로 다루기 시작한 것과 대비할 때, 한국 사회의 침묵은 더욱 선명해진다.

뇌성마비인을 ‘도움이 필요한 대상’으로만 바라보는 시선은 이들의 삶을 수동성 속에 가둔다. 그러나 뇌성마비인은 보호의 객체가 아니라 권리의 주체이다. 이동을 가능하게 하는 보조기기 접근성, 지속적인 의료와 재활을 받을 권리, 우울과 불안을 다루는 정신건강 상담서비스, 자기결정에 기반한 성적 권리, 그리고 의미 있는 노동과 교육의 기회는 모두 선택이 아니라 권리이다. 이는 복지의 문제가 아니라 인간 존엄, 즉 인권의 문제이다.

뇌성마비인의 삶 그 자체는 우리 사회가 인간을 어떻게 정의하는지를 묻고 있다. 생산성과 효율을 기준으로 인간의 가치를 재단하는 우리 사회에서, 이들의 존재는 끊임없이 설명을 요구받는다. 그러나 질문은 반대로 던져져야 한다. 누가 인간의 기준을 정하는가. 누구의 몸과 삶이 정상으로 설정되어 왔는가. 뇌성마비인의 삶이 가능한 사회는 결국 모두의 삶이 가능한 사회이다.

뇌성마비인은 인간 존엄을 추상적으로 논의하게 만드는 대상이 아니다. 이들은 존엄이 시험대에 오르는 현장 그 자체이다. 말로 표현되지 못한 고통을 몸으로 견디며 살아가는 이 존재자 앞에서, 사회가 응답하지 않는다면 그 침묵은 곧 윤리적 실패이다. 이 질문에 성실히 응답하는 것, 그것이야말로 공동체 전체가 감당해야 할 책임이다.

이제 질문은 여기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야 한다. 뇌성마비인의 삶의 질과 희망을 어떻게 실제로 높일 것인가. 그 해답은 외부의 시혜적 개입이 아니라, 이미 우리 안에 존재하는 역량과 지성을 어떻게 조직하고 연결할 것인가에 있다.

우리 사회에는 학문과 예술, 실천의 영역에서 탁월한 성취를 이룬 뇌성마비인들이 존재한다. 사회복지학 박사로 제도와 정책을 분석해 온 연구자, 국문학 석사이자 시인으로 언어를 통해 인간의 내면과 세계를 해석해 온 창작자, 신학 석사로 신의 현대적 의미와 필요성, 재활학 박사이자 철학 석사로 인간 존재와 실존적 의미를 사유해 온 사상가, 금융과 경제를 전문적으로 다뤄 온 실무가, 클래식 음악을 통해 인간의 감정과 구조를 해석하는 예술적 전문가들까지, 이들은 모두 뇌성마비를 삶의 조건으로 지닌 채 각자의 영역에서 깊이 있는 사유와 전문성을 축적해 온 존재자들이다.

이러한 뇌성마비인들이 흩어진 개인으로 남아 있는 한, 그 역량은 사회적으로 가시화되기 어렵다. 그러나 이들이 자조모임이라는 형태로 서로 연결되고, 강의와 대화를 중심으로 한 학습 공동체를 형성한다면 상황은 완전히 달라진다. 각자가 자신의 전문 영역을 맡아 순환적으로 강의를 진행하고, 삶의 경험과 학문적 성찰을 함께 나눈다면, 이는 단순한 교육 프로그램을 넘어 뇌성마비인 스스로가 만들어 가는 지적 공공영역이 된다.

이러한 자조 기반 강의 공동체는 여러 측면에서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 첫째, 이는 뇌성마비인을 수혜자가 아닌 지식 생산자이자 전달자로 위치시킨다. 둘째, 동료 뇌성마비인들에게 “가능성의 실제 모델”을 제공함으로써, 추상적인 희망이 아니라 구체적인 삶의 경로를 제시한다. 셋째, 강의와 토론이라는 형식은 자존감 회복과 자기정체성 재구성에 결정적인 역할을 하며, 고립된 개인을 사유하는 시민으로 복원시킨다.

더 나아가 이러한 모임은 삶의 질 향상이라는 측면에서도 실질적인 효과를 가진다. 지적 자극과 사회적 관계는 우울과 위축을 완화시키고, 배움과 가르침의 경험은 삶의 의미를 재구성한다. 이는 의료나 돌봄만으로는 결코 대체할 수 없는 영역이며, 인간이 인간답게 살아가기 위해 반드시 필요한 조건이다. 삶의 희망은 외부에서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말하고 생각하며 서로를 비추는 과정속에서 생성된다.

무엇보다 중요한 점은, 이러한 시도가 뇌성마비인의 삶을 ‘극복 서사’로 포장하지 않는다는 데 있다. 이는 비장애 기준에 도달하기 위한 경쟁이 아니라, 각자의 조건 속에서 사유하고 기여하며 살아갈 수 있음을 확인하는 과정이다. 바로 이 지점에서 자조모임 기반의 강의 공동체는 복지 프로그램이 아니라, 존엄을 실천하는 하나의 사회적 형식과 실천이 된다.

뇌성마비인의 삶을 바꾸는 것은 거대한 담론이 아니라, 연결된 인간들의 지속적인 사유와 연대이다. 이미 충분히 뛰어난 뇌성마비인들이 현재 존재한다. 이제 필요한 것은 그들이 서로를 발견하고, 서로의 목소리를 듣고, 믿고 함께 말할 수 있는 장을 만드는 일이다. 그 장이 넓어질수록 뇌성마비인의 삶은 고립된 고통이 아니라, 의미와 희망을 생성하는 삶으로 전환될 것이다.

인간의 존엄은 보호 속에서 완성되지 않는다. 존엄은 말할 수 있을 때, 가르칠 수 있을 때, 서로에게 의미 있는 존재가 될 때 비로소 현실이 된다. 뇌성마비인 스스로가 지식과 삶의 주체로 서는 이 작은 공동체의 실험을 사단법인 해냄복지회가 실천할 때, 결국 우리 사회 전체가 인간을 다시 정의하는 하나의 시작점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이 글은 사단법인 해냄복지회 이사장인 김재익 박사 님이 보내왔습니다. 에이블뉴스 회원 가입을 하고, 취재팀(02-792-7166)으로 전화연락을 주시면 직접 글을 등록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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