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이블뉴스 이디다 칼럼니스트] 운동 시설의 문을 열고 들어서는 순간, 장애를 가진 이들이 가장 먼저 마주하는 벽은 계단이나 턱이 아니다. 그것은 바로 장애 당사자를 관통하여 그의 뒤의 보호자에게 머무는 시선이다. 악의 없는 친절, 배려라는 이름의 안부, 그리고 “보호자분이 더 잘 아시니까요”라는 익숙한 정당화 속에서, 운동의 주체인 장애 당사자는 순식간에 관찰 대상이자 관리의 영역으로 밀려난다.

배리어프리 필라테스 센터를 운영하며 수많은 몸을 마주해온 나는 이 '당연시되는 실패'가 현장에서 어떻게 전문성을 갉아먹는지 목도해왔다. 이제 진중한 호흡으로 그 구조를 해체해보고자 한다.

‘대리자’ 그림자에 가려진 주체, 보호자 중심 응대가 놓치는 현장의 진실.  ©이디다
‘대리자’ 그림자에 가려진 주체, 보호자 중심 응대가 놓치는 현장의 진실.  ©이디다

공중에 부유하는 대화, 소외된 섬

강사와 보호자가 선 채로 대화를 나눌 때, 휠체어에 앉아 있거나 운동 기구에서 기다리는 운동 당사자의 머리 위로 말들이 오간다. 운동하는 회원 당사자의 몸에 관한 이야기임에도 불구하고, 그 대화는 주체를 생략한 채 공중에서 부유하는 섬들과 같다.

그 시간 속에서 당사자는 그 섬들 아래 놓인 또 다른 섬이 된다. 가장 가까워야 할 강사와의 심리적 거리는 그 보이지 않는 대화의 높이만큼 멀어진다.

이 구조에서 장애인은 수업의 중심이 아니라 ‘관리 대상’이 된다. 주체가 소외된 대화는 반드시 어긋나기 마련이며, 실제 몸이 내뱉는 미세한 반응은 대화의 소음 속으로 사라진다.

보호자의 ‘상태’와 당사자의 ‘감각’ : 필터가 만드는 정보의 왜곡

보호자는 중요한 파트너다. 하지만 보호자가 장애 당사자의 몸을 대신 느껴줄 수는 없다. 보호자가 나빠서가 아니라, 보호자의 ‘언어’와 당사자의 ‘감각’이 본질적으로 다르기 때문이다.

보호자는 “어제 잠을 잘 못 자서 컨디션이 안 좋아요”라고 말하지만, 정작 당사자의 몸은 “오늘따라 왼쪽 고관절의 긴장이 심해 앉아 있는 것 자체가 고통스럽다”고 외치고 있을 수 있다.

보호자의 정보는 포괄적인 ‘상태’를 말하지만, 당사자의 정보는 실시간적인 ‘통증’과 ‘가동 범위’를 말한다. 시설이 보호자의 필터를 거친 정보에만 의존할 때, 운동 처방은 장황한 설명에 비해 실행은 더뎌지고, 정작 필요한 미세한 조정은 골든 타임을 놓치게 된다.

보호자 중심 구조가 시설의 전문성을 갉아먹는다

단순히 인권의 문제를 넘어, 이는 시설의 ‘운영 효율’과 ‘실력’에 직결되는 문제다. 아이러니하게도 보호자에게만 의존하는 시설은 운영 면에서 훨씬 취약해진다.

보호자에게 의존하는 강사는 스스로 ‘관찰하는 눈’을 퇴화시킨다. 당사자의 미세한 표정 변화, 근육의 떨림, 호흡의 깊이를 직접 읽어내는 대신 타인의 입만 바라보기 때문이다. 이는 결국 강사의 전문성 저하로 이어지며, 시설 전반의 서비스 질을 하향 평준화시킨다. 보호자가 없을 때 수업이 불가능해지는 것은 안정이 아니라 시스템의 무기력한 의존일 뿐이다.

‘참는 것’이 익숙해진 이들의 침묵

가장 뼈아픈 지점은 당사자가 자신의 몸에 대해 발언할 의지조차 잃게 된다는 것이다. 설명이 끝날 때까지 기다리다 타이밍을 놓치고, 나의 불편함보다 보호자와 강사 사이의 합의가 우선되는 과정을 반복하며 이들은 ‘참는 것’을 내면화한다.

자신의 감각이 존중받지 못하는 공간에서 운동은 더 이상 즐거운 탐색이 아니다. 그저 사고 없이 버텨내야 할 고역의 시간이자, 빠르게 지나가길 바라는 통과 의례가 될 뿐이다. 당사자가 입을 닫는 순간, 그 시설의 전문성은 생명력을 잃는다.

의존이 아닌 안정을 향한 균형

이 글은 보호자를 배제하자는 주장이 아니다. 핵심은 ‘배제’와 ‘의존’ 사이의 정교한 균형이다.

첫 질문은 반드시 당사자에게 던져야 한다. 그에 따른 보안적 정보만을 보호자에게 구해야 한다.  최종적인 의사결정과 조정은 다시 당사자의 반응을 확인하며 마무리되어야 한다.

장애인을 진정으로 존중하는 시설은 보호자를 존중하면서도 시선의 끝을 언제나 당사자의 눈동자에 고정한다. 운동은 결코 누군가가 대신해 줄 수 없는 고유한 영역이며, 그 기본 원칙은 장애가 있다고 해서 달라지지 않는다.

왜 어떤 이들은 단 한 번의 방문 이후 다시는 나타나지 않는가. 아무도 묻지 않는 그 침묵 속에 현장의 부끄러운 민낯이 숨어 있다. 떠난 뒤의 침묵은 항상 현장의 결과다. 다음 글에서는 이 ‘다시 오지 않는 이유’를 묻지 않는 구조에 대해 이야기해보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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