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사회는 중증장애인의 노동을 너무 오랫동안 잘못 이해해 왔다. 그들의 노동을 권리로 보지 않고, 복지의 연장선에서만 다루어 왔다. 일할 수 있는가를 먼저 물었다면, 그럼 왜 일할 수 없게 되었는가는 묻지 않았다. 중증장애인이 노동을 하는데, 개인의 현상적 신체기능만 문제 삼았지, 사회가 어떤 구조를 만들어 왔는가는 돌아보지 않았다.
그 결과 중증장애인의 노동은 늘 설명해 줄 것을 요청받았고, 다른 노동은 당연히 인정받는 동안 중증장애인의 노동만은 끝없이 정당성을 스스로가 입증해야만 했다. 이것이야말로 가장 오래되고 가장 교묘한 차별이 아니고 무엇이랴?
중증장애인의 일자리 문제는 단순한 고용의 문제를 벗어나 그것은 누구를 시민으로 인정할 것인가, 누구의 삶을 공적 책임의 범주 안에 둘 것인가를 묻는 정치의 문제라 할 수 있다. 그들에겐 노동은 단지 임금을 버는 수단만은 아닌 것이다. 사실 지금처럼 AI 시대 와서는 더욱 그렇게 되어가고 있다.
여기에서 노동은 인간이 살고 있는 사회 속에서 자기 자리를 얻는 방식이며, 존재를 승인받는 통로이고, 시민권이 구체적인 삶으로 내려오는 구체적 자리이다. 그러므로 중증장애인의 노동이 배제된다는 것은 단지 취업의 실패가 아니라 시민권의 박탈을 뜻한다고 볼 수 있다. 바로 이 점에서 중증장애인의 노동은 공공의 책임이어야 한다고 하시 한번 강조해 준다.
권리중심 중증장애인 일자리는 이 진실을 가장 선명하게 드러내고 있다. 사실 이 일자리는 전통적인 의미의 생산직 일자리로는 볼 수 없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노동이 아닌 것은 절대 아니다.
장애인의 노동할 권리를 알리고, 접근성을 점검하고, 장애를 바라보는 사회적 인식을 바꾸며, 장애 차별적 구조를 드러내며, 문화예술을 통해 사회의 감성을 흔드는 일은 분명한 공공성을 띤 노동이라 할 수 있다. 오히려 시장이 계산하지 못하는 가치를 사회가 실제로 생산해 내는 노동이다. 상품을 만들지 않는다고 해서 노동이 아닌 것이 아니다. 공동체를 더 평등하고 더 접근가능하게 만드는 일 또한 분명한 노동이다. 그리고 그런 노동일수록 시장이 아니라 공공이 먼저 책임져야만 한다.
바로 이 지점에서 우리 사회는 오랫동안 노동의 기준을 너무 좁게 설정해 왔다고 볼 수 있다. 지금까지 우리 사회는 생산성과 효율성, 속도와 수익성만을 노동의 기준으로 삼았다. 이 기준 안에서 중증장애인은 언제나 불리할 수밖에 없다. 느리면 가치가 낮고, 많이 만들어 내지 못하면 쓸모가 적다고 판단하는 질서 속에서는 중증장애인의 노동은 애초에 불가능한 것으로 분류될 수밖에 없다.
그러나 이것은 노동의 본질을 축소한 결과일 뿐이다. 사회를 유지하는 데 필요한 일은 민간 공장에서만 생기지 않는다. 권리를 보장하고, 차별을 줄이며, 공공의 접근성을 높이고, 시민사회의 감수성을 바꾸는 일 또한 사회를 움직이는 핵심 노동이다. 그리고 나서 중증장애인의 노동을 공공성을 기준으로 함께 생산적 가치도 구현해 내는 방법의 하나인 우리나라의 중증장애인에게 실패로 끝나버린 지원고용 제도도 한번 중증장애인의 노동의 가치 실현을 위해 실현해 보았으면 하고 기대한다. 이것은 시장의 잣대로도 평가 가능하고, 또한 공동체의 지속에도 반드시 필요한 중요한 노동이기 때문이다.
더 근본적인 문제는 사실 중증장애인이 노동에서 배제되는 이유를 사회가 의도적으로 개인의 한계로만 돌려 왔다는 데 있다. 중증장애인이 일하기 어려운 것은 그 몸이 문제여서만이 아니다. 이동권이 보장되지 않은 도시, 보조공학과 근로지원이 충분히 갖추어지지 않은 일터, 비장애 중심으로 설계된 직무와 시간표, 배제를 정상으로 받아들이는 조직 문화가 중증장애인을 밀어낸다.
다시 말해, 중증장애인의 실업은 개인의 무능이 아니라 사회의 구조적 설계 실패와 고용제도의 부재였다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해법 역시 개인에게 더 노력하라고 요구하는 데 있지 않다. 공공이 구조를 바꾸고, 노동의 가능한 조건을 마련하고, 노동이 가능하도록 사회를 다시 설계하는 데 있다. 이 점에서 중증장애인의 노동은 처음부터 공공의 책임이어야 하며, 다양한 중증장애인의 고용제도의 개발과 실현이라 할 수 있다.
그리고 서울시는 한때 권리중심 중증장애인 맞춤형 공공일자리를 도입하며 가장 배제된 사람들에게 공적 노동의 문을 열었다. 그러나 이후 이 사업은 행정의 판단 속에서 흔들렸고, 끝내 폐지되고 만다. 행정은 이를 사업 조정이라고 불렀지만, 중증장애인 당사자에게 그것은 삶의 토대를 잃는 실업이었다. 수백 명의 노동이 하루아침에 지워졌고, 일자리는 다시 권리가 아니라 서울시 공무원 재량의 문제가 되었다.
이 사건이 드러낸 것은 단순한 지방정부의 정책 변화가 아니다. 권리가 아직 제도로 고정되지 못한 사회의 취약성과 다양한 고용제도의 부재, 중증장애인의 노동이 얼마나 쉽게 예산의 항목으로 축소되는가 하는 냉혹한 현실이다. 서울시의 폐지는 하나의 종결이 아니라 경고였다. 법적 근거와 국가 책임이 없는 권리는 언제든 살아남기 힘들며, 삭제될 수 있다는 경고였다.
이 사건은 또 다른 진실도 드러냈다. 우리 사회는 중증장애인이 일하는 것보다 중증장애인이 음성으로 직접 말하는 것을 더 불편해한다는 사실이다. 조용히 존재할 때는 보호의 대상이 되지만, 권리를 말하고 제도를 비판하면 갑자기 논란의 대상이 되어진다.
그러나 사실 권리중심 노동의 본질은 애초에 침묵을 깨는 데 진정 가치가 있다고 할 것이다. 장애인의 삶에 있어 차별을 말하고, 접근 불가능을 드러내고, 사회가 만든 장벽을 지적하는 것은 이 노동의 핵심적 가치이다.
따라서 그것이 불편하다는 이유로 일자리의 정당성까지 의심하는 순간, 사회는 중증장애인에게 노동은 허락하되 목소리는 허락하지 않겠다고 말하는 셈이 된다. 그것은 노동권의 인정이 아니라 통제된 침묵적 참여일 뿐이라 할 수 있다.
권리중심 중증장애인 일자리를 향해 비효율이라는 비난이 따라붙는 것도 이와 절대 무관하지 않다. 그러나 무엇이 비효율인가를 다시 물어야 한다. 중증장애인을 노동시장 밖에 방치하고, 가족과 시설과 빈곤에 기대어 살아가게 만든 뒤, 그 모든 사회적 비용을 다른 이름으로 감당하는 체제가 과연 효율적인가. 반대로 중증장애인이 공공의 책임 아래 노동하고, 임금을 받고, 관계를 만들고, 지역사회 안에서 자기 자리를 갖게 되는 것이 정말 비효율인가.
이 질문에 정직하게 답한다면, 진짜 비효율은 권리중심 일자리가 아니라 중증장애인의 노동을 합리적으로 배제해 완다고 할 수 있는 직업재활시설 같은 기존 질서라는 것을 부정하기 어렵다. 배제는 값싸 보이지만, 사실은 가장 많은 비용을 남긴다. 빈곤과 고립, 가족 의존과 시설 수용, 낮은 기대와 사라진 미래가 바로 그 비용이다.
결국 쟁점은 단순하다. 중증장애인의 노동을 특별한 예외로 볼 것인가, 아니면 민주사회가 당연히 보장해야 할 권리로 볼 것인가. 전자의 관점에 서면, 권리중심 공공일자리는 언제나 한시적 실험으로 남게 된다. 정권과 단체장의 의지에 따라 생겼다 사라지고, 늘 설명을 요구받고, 필요할 때 가장 먼저 정리되는 항목이 된다.
그러나 후자의 관점에 서면 결론은 달라진다. 법적 근거가 마련되어야 하고, 국가와 지방자치단체의 책임이 분명해져야 하며, 조금 더 중증 장애이면서 경한 장애인들을 위해 다양한 고용제도 또한 만들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직무 기준은 더 정교해져야 하고, 근로지원과 이동지원, 보조공학과 유연한 노동환경이 결합되어야 한다. 그렇게 해야 중증장애인의 노동은 비로소 사업이 아니라 확실한 제도가 된다.
이때 중요한 것은 일자리를 단지 중증장애인을 위한 특별한 배려로 이해하지 않는 일이다. 그것은 사회 전체의 민주주의 수준을 한 단계 높이는 정치경제적 공공투자이다. 가장 배제된 사람이 노동할 수 있는 사회는, 결국 모두에게 더 가치 있고 나은 사회가 될 수 있다.
접근성이 높아지고, 공공서비스가 더 촘촘해지고, 사회의 감수성이 더 깊어지고, 인간의 존엄이 앞선다는 원칙이 제도 속에 새겨지기 때문이다. 중증장애인의 노동을 공공의 책임으로 세운다는 것은 단지 몇 개의 일자리를 늘리는 문제가 아니다. 그것은 사회가 인간을 바라보는 기준을 다시 쓰는 아주 중요한 일이다.
중증장애인의 노동은 동정의 대상이 절대 아니어야 한다. 더더욱 시혜의 대상은 결코 아니다. 그것은 국가가 보장해야 할 노동권이며 다양한 중증장애인 고용제도를 개발해 실현하는 것이며, 공공이 책임져야 할 시민권의 문제라 정확하게 말할 수 있다.
지금까지 우리 사회는 이 문제를 너무 오래 미뤄 왔다. 그러나 서울시의 폐지 이후 분명해진 것이 하나 있다. 더 이상 재량과 선의에 맡겨 둘 수 없다는 사실이다. 노동을 통한 인간의 삶이 실제 권리가 권리이기 위해서는 제도가 되어야 하고, 실제 제도가 제도이기 위해서는 국가의 책임이 분명해야 한다.
그리고 법이 하루 빨리 국회에서 제정되어야 한다. 중증장애인의 노동을 공공의 책임으로 받아들이는 순간, 비로소 이 사회는 가장 늦게 도착한 사람과 함께 미래로 나아갈 수 있다. 그 문턱 앞에서 더 이상 머뭇거릴 이유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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