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은 누구나 살아가면서 예상하지 못한 위기를 만날 수도 있다. 그러나 중도장애인이 경험하는 위기는 단순한 어려움이나 실패의 차원을 넘어선다고 할 것이다. 어느 날 갑자기 찾아온 교통사고, 뇌졸중, 척수손상, 질병은 단지 신체 기능의 상실만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그것은 지금까지 살아온 삶의 방식과 정체성, 인간관계, 미래에 대한 기대와 꿈마저 송두리째 흔들어 버린다.

어제까지 아무 일 없이 직장에서 일하던 사람이 더 이상 출근할 수 없게 되고, 가족을 책임지던 가장이 돌봄의 대상이 된다. 자유롭게 걷고 움직이던 사람이 휠체어에 의존해야 하고, 자신의 의지대로 살아가던 사람이 타인의 도움 없이는 일상을 유지하기 어려운 상황에 놓인다. 이렇게 중도장애는 단순한 신체적 변화뿐 아니라 삶 전체를 뒤흔드는 하나의 큰 사건이 된다.

바로 이 지점에서 덴마크 철학자 키에르케고르가 말한 ‘절망’은 중도장애인의 삶을 깊이 이해할 수 있는 중요한 철학적 통찰을 우리에게 제공한다.

많은 사람들은 절망을 슬픔이나 우울감으로 이해한다. 그러나 키에르케고르에게 절망은 단순한 감정만은 아니다. 그는 절망을 “자기 자신이 되지 못하는 상태”라고 정의했다. 다시 말해 절망이란 자신을 잃어버린 상태이며, 현재 자신의 존재를 받아들이지 못하는 상태이다.

중도장애인이 갑자기 사고나 질병으로 장애를 처음 경험했을 때 가장 힘든 것은 몸의 변화만이 아니다. 더 큰 고통은 과거의 자신과 현재의 자신 사이에서 발생한다. 장애 이전의 나는 건강했고, 사회 속에서 고유의 역할을 수행했으며, 미래에 대한 계획을 세울 수 있었다. 그러나 장애 이후의 나는 낯설고 불완전하게 느껴진다.

많은 중도장애인들이 재활병원 병실에서, 혹은 퇴원 후 집 안에서 홀로 이런 생각을 한다.

“왜 하필 나인가.”

“이렇게 살 바에는 차라리 죽는 것이 낫지 않을까.”

“예전의 나로 돌아갈 수만 있다면.”

이러한 말은 단순한 낙담이 아니다. 그것은 지금의 자신을 받아들일 수 없다는 하나의 거대한 절규이며, 더 이상 자기 자신으로 살아갈 수 없다는 실존적 고통의 표현이다.

키에르케고르의 관점에서 보면 이것이 바로 절망이다. 절망은 장애 때문에 생기는 것이 아니라, 장애 이후의 자신의 상태를 더 이상 사랑할 수 없을 때, 즉 자신의 존재를 부정할 때 시작된다고 할 수 있다. 더욱 안타까운 것은 사회가 이러한 절망을 더욱 깊게 만들고 있다는 사실이다. 우리는 여전히 장애를 상실과 결핍의 관점에서 바라본다. 장애인을 만나면 “안됐다”고 말하고, “예전에는 잘 살아 나갔는데”라고 이야기한다. 사회는 장애를 가진 사람을 이전의 삶과 비교하며 평가한다.

그 결과 중도장애인은 자신의 현재를 삶의 한 과정으로 받아들이기보다 실패한 삶이자 끝장난 것으로 여기게 된다. 여기서 장애는 신체의 손상에서 끝나지 않고 존재의 상실로 확대된다.

그러나 키에르케고르의 철학은 여기에서 멈추지 않는다. 그는 절망을 인간 존재의 가장 깊은 병이라고 말하면서도, 동시에 절망이야말로 진정한 실존에의 출발점이라고 보았다. 왜냐하면 인간은 절망의 밑바닥에서 비로소 자기 자신과 마주하기 때문이다.

중도장애인 역시 어느 순간 새로운 질문을 던지기 시작한다. “나는 장애 이전의 나만이 진짜 나였는가.”,“지금의 나도 여전히 존엄한 존재인가.”,“나는 앞으로 어떤 삶을 살아갈 것인가.”

이 질문은 단순한 재활만의 문제는 아니다. 그것은 인간 존재에 대한 질문이며, 삶의 의미를 다시 찾기 위한 실존적 물음이라 할 수 있다.

실제로 많은 중도장애인들이 장애 이후 새로운 삶을 만들어 간다. 원직복귀(복지 선진국의 경우)도 하며, 동료상담가가 되기도 하고, 자립생활운동가가 되기도 하며, 새로운 직업과 새로운 인간관계를 만들어 간다. 물론 그 과정은 결코 쉽지 않다. 때로는 수많은 좌절과 눈물, 실패를 경험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시 삶을 선택한다. 키에르케고르는 인간을 가능성의 존재라고 말했다. 인간은 현재의 조건으로만 규정되지 않는다. 인간은 언제나 새로운 가능성을 향해 나아갈 수 있는 존재다.

중도장애인의 삶도 마찬가지다. 장애는 분명 커다란 상실이다. 그러나 그것이 삶 전체를 결정하지는 않는다. 인간은 장애를 안고 살아가면서도 새로운 의미를 발견할 수 있고, 새로운 꿈을 꾸며, 새로운 자신을 만들어 갈 수 있다. 그리고 자신의 삶 자체에서 자기결정권을 행사할 수 있도록 자립생활을 실현할 수 있다.

이러한 관점에서 자립생활은 단순히 혼자 살아가는 기술이 아니다. 자립생활은 절망을 넘어 진정으로 자기 자신을 다시 선택하는 과정이다. 누군가의 도움을 받더라도 자신의 삶을 스스로 결정하고, 자신의 미래를 스스로 설계하며, 자신의 존재를 긍정하는 삶의 방식, 즉 실존을 의미한다.

중도장애인의 실존적 삶은 장애를 극복하는 이야기가 아니다. 그것은 절망 속에서도 자기 자신을 포기하지 않는 이야기이며, 무너진 삶의 자리에서 다시 일어나 새로운 의미를 찾아가는 인간 존엄의 이야기다.

키에르케고르는 인간이 자기 자신이 될 때 비로소 진정으로 실존적으로 살아간다고 말했다.

중도장애인의 삶 역시 그러하다. 장애를 얻기 이전의 나를 그리워하며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지금의 나를 받아들이고 새로운 삶을 선택할 때 인간은 다시 태어난다.

절망은 끝이 아니다.

때로 절망은 인간을 더 깊은 자기 이해와 더 성숙한 삶으로 이끄는 문이 된다.

중도장애인의 실존적 삶은 바로 그 문을 통과하는 용기의 기록을 적어나가는 것을 말하고 있다.

-장애인 곁을 든든하게 지켜주는 대안언론 에이블뉴스(ablenews.co.kr)-